그를 패륜아라 한다. 잘못된 판단이다. 그가 사형에 처한 사람은 고무부가 아니라 군 장성 장성택이다. 도덕과 군자의 세계라던 조선은 고모부보다 더했다. 조카에게 사약을 내리고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였다. ‘백두의 혈통’을 중시하는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정치적인 행사는 패륜이 아니라 잔혹이다. 그런 면에서 ‘최고존엄모독’이라는 현영철 처형 이유가 더 그답다.
애송이건 패륜아건 관계없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그가 영화광이던 선왕(先王) 김정일을 제대로 계승했다는 것이다. 공포영화 연출에 소질을 보여 감독이자 살인마 주인공을 겸하는 듯하다.
공포 연출을 위해 주변을 마구 끌어들여 희생자로 삼는다. 지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공포영화 속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연일 언론은 애송이의 잔혹함을 비난하지만 애송이는 충실히 대본을 연기 하는 중이다. 우리 역할은 희생자다.
공포영화의 법칙
어릴 적 친구 몰래 나타나 "워!"하면 기겁하며 놀란다. 공포영화의 제 1법칙은 바로 놀라게 하는 것이다. 공포영화가 무서운 것은 교활한 악당이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희생자를 공격하는 데 있다. 따라서 알고 보면 공포영화란 무섭기보다는 기발하다.
대부분 공포영화는 저예산 B급이다. 자본이 부족하니 대신 충격적인 아이디어로 강한 인상을 주려 한다. 투자대비 수익성이 생각하면 깊이 있는 감성보다는 말초적인 공포가 더 효과적이다. 때문에 불황에 강하다. 공포를 연출하는 한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김정은도 다를 바 없다. 공포는 저예산 감성이지만 투자대비 고수익이다. 그래서 깜짝 쇼는 흥행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대부분의 세계는 전율하면서도 안전한 객석에서 즐긴다. 그저 야유하며 팝콘이나 던지면 끝나지만 우리는 공포 쇼에 출연한 희생자다. 절대 느긋할 수 없다.
산자와 죽는 자의 법칙
공포영화에는 삶과 죽음의 가르는 공식이 있다. 이를 숙지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죽는 자는 누구이고, 누가 끝까지 살아남아 악당을 물리치고 영웅이 될 것인가?
먼저 국정원은 죽는다. 살아남고 싶다면 자리를 지켜야지 “곧 돌아올게” 라고하며 돌아다니면 당한다. 자기 자리에서 지켜야 할 의무를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딴 짓 하다가는 숨어서 기다리던 살인마를 피하지 못한다. 빈 집은 집이 아니라 살인마의 무대이다. 기웃거리다가는 죽는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은 결코 빈집이 아니었다. 빈집이라 생각했기에 악당에게 당했다. 서로 이탈하면 죽는다. 국회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 당한다. 국회가 충실해야할 임무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합의다. 민생을 위한 법안 제정이 최우선이다. 임무는 팽개치고 매일 싸움질에 ‘종북’공포 놀이하다가는 오래 못 간다. 술과 마약, 뇌물 같은 도덕적 해이 역시 악당이 노리는 포인트다.
그렇다면 살아서 살인마를 물리치는 영웅은 누구인가? 바로 희생을 무릅쓴 연약한 처녀다. 아름다운 처녀란 사랑과 희생 그리고 경계심의 상징이다. 모든 덕목 가운데 특히 경계심이 관건이다. 경계의 실패는 삶과 죽음을 가른다. 보통 살인마란 쉽게 죽지 않는다.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언제 다시 벌떡 일어나 공격할지 모른다. 경계심이 중요한 이유다.
살인마를 이기는 영웅
대부분의 공포영화는 시작 30분까지 살인마가 등장하지 않는다. 희생자의 방관을 유도하고 죽일만한 이유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쓸데없는 사회분열, 정치적인 협잡 혹은 정치공작은 줄서서 희생되기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 이제, 공포영화는 시작했고 우리에게는 30분이 주어졌다. 어떻게 살인마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끝내 살아남아 살인마를 물리치는 처녀가 답을 말해준다.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는 민주주의 사회 그리고 자기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늦추지 않는 경계 태세가 그것이다.
/중앙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wesyuzna@naver.com(끝)
사진, 웨스 크라이븐 영화 스크림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