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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체험 해보니... 같은 자리만 '뱅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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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이 경제부 기자) “아무 것도 안 보여요. 무서워서 발을 못 옮기겠어요.”

안대를 쓰자마자 밝았던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흰 지팡이를 쥐었지만 처음 한 걸음 내딛는 것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국립재활원 장애체험장. 실제 길거리처럼 구성된 세트장을 안대를 쓴채 20분 가량 걸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평소 거리를 걸을 때 얼마나 불편한지 직접 느껴보기 위한 체험이었지요.

사실 안대를 쓰기 전 미리 체험장을 스윽 훑어봤을 때까지만 해도 “저 정도야 눈 감고도 가겠다” 싶었습니다. 큰 오르막 내리막도 없고, 평탄한 길에 거리도 짧아보였거든요. 평소대로 걸어서라면 20초면 목표지점에 도착하겠더군요. 하지만 눈 앞이 캄캄해지자 이 20초는 20분으로 길어졌습니다.

한참을 같은 자리만 맴맴 돌았습니다. 체험장에 낭떠러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바닥에는 점자블록이 깔려있었는데요. 직선, 동그라미 등 요철 생김새에 따라 직진, 우회전, 정지 등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점자블록에 익숙하지 않은 저는 아무리 발을 두드려대도 요철의 모양을 알기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한 열 발자국쯤 갔을까요. 갑자기 점자블록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할수밖에요. 국립재활원 관계자는 “이 체험시설은 실제 거리보다 훨씬 환경이 좋은 편”이라며 “거리에 나가면 패인 블록이 많아 훨씬 걷기가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국내 공중시설 중 점자블록이 설치된 곳은 36%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그냥 감에 의존해 걸어야합니다.

횡단보도 앞에 섰습니다. “길을 건너가도 좋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들렸지만 실제 건너가기까진 한참이 걸렸습니다. 실제 도로에선 이 정도 좁은 건널목엔 신호등이 설치돼있지 않다고 합니다. 신호등도 없고, 음성안내도 없으니 시각장애인들은 건널목 하나 건너는 데도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작년에 핀란드에 갔다가 굉장히 놀란 적이 있습니다. 길을 걷고, 슈퍼를 들르고, 영화관에 갔을 때 어디에나 장애인이 많았거든요. 휠체어를 탄 아이들이 공원에서 신나게 놀고, 흰 지팡이를 든 시각장애인 청년은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겼습니다. 핀란드에 한국보다 장애인이 많아서일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장애인들이 집 밖을 나와서도 큰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인프라 덕택이겠지요.

한국은 어떨까요.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면 뭔가 부족하다는 뜻이겠지요. 정부는 최근 휠체어 보행로를 확보하고 장애인 화장실 내 휠체어가 회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내용의 시행규칙을 개정했습니다. 한국의 장애인 생활 환경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길 기대해봅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4.27(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