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스타 서비스를 탑재하기 전 GM의 자동차는 그저 빠른 이동을 위한 ‘제품’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자동차라는 제품을 ‘플랫폼’ 삼아 다양한 서비스가 덧붙여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고를 미리 예측하고 속도 조절을 통해 미연에 이를 방지하거나 교통이 혼잡한 도로를 예상해 가장 빠른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등 그 어떤 ‘화려한 변신’도 가능한 것이다. 플랫폼의 위력이다.
모든 것이 플랫폼이다
2005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모든 제품은 플랫폼이다(Every Product’s a Platform)’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됐다. 무려 10년 전 발표된 이 논문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무엇이든 상상력만 발휘한다면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플랫폼은 사실 최근 들어 갑자기 대두된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야쿠르트 아줌마도 일종의 플랫폼이다. 짧은 시간 안에 유제품을 신선한 상태로 배달하는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거대한 판매망에 힘입어 다양한 종류의 식품을 취급한다. 최근에는 이를 홀몸노인 도우미에도 활용하고 있다. 홍콩의 리앤드펑은 패션 산업의 강자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이곳엔 단 한 명의 재봉사도 고용돼 있지 않다. 그저 의류 생산 업체와 고객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이 회사는 현재 이 같은 플랫폼 시스템을 바탕으로 의류뿐만 아니라 장난감 등 각양각색의 품목을 취급하고 있다.
‘플랫폼, 경영을 바꾸다’의 저자인 최병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원은 “플랫폼은 일상생활과 비즈니스에 너무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형태를 지닌 플랫폼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두 개 이상의 고객군이 만나는 장이 돼야 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택시 플랫폼 업체인 우버는 택시 운전사와 택시 고객을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했다. 택시 운전사는 더 빨리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고 택시 고객은 더 싼값에 택시를 이용함으로써 이 둘 사이의 새로운 거래가 성립된 것이다. 우버의 트래비스 칼라닉 최고경영자(CEO)가 “플랫폼=기업+시장”이라고 정의한 이유다.
기업이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시장에 가져다 파는 것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시대는 끝났다. 기업이 만들어 놓은 시장(플랫폼)으로 다양한 고객들을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가치를 수익으로 전환하는 시스템이 중요해진 것이다.
최 연구원은 “어떤 형태도 플랫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이 무엇을 플랫폼으로 할지 선택하는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기업의 가치를 키울 시장’으로서의 가능성을 잘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운송 업체인 아마존이 대표적인 예다. 1994년 설립 당시만 하더라도 아마존과 같은 물류 기업들은 대부분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정보기술(IT)센터를 아웃소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CEO는 바로 이 IT 시스템이야말로 플랫폼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설립 후 6~7년간 적자를 감수하고 끊임없이 컴퓨터 서버와 온라인 거래 소프트웨어 같은 IT 시스템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상품 정보와 고객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미국의 전통적 체인 서점인 보더스가 이 같은 아마존을 뛰어넘기 위해 플랫폼을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비용 부담으로 경쟁사인 아마존의 IT 시스템(플랫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새삼스러울 것 없는 플랫폼이 최근 기업들의 ‘핵심 전략’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야쿠르트 아줌마라는 강력한 플랫폼은 한국야쿠르트의 강력한 경쟁력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유제품 시장에서 ‘기업 간 경쟁’에 국한됐던 게 사실이다. 창조경제연구회의 플랫폼 포럼 주관 연구원인 최선 연구원은 “현대는 인터넷을 통해 모든 기기와 사물이 연결되면서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며 “플랫폼 하나로 다양한 산업 분야를 넘나들게 되면서플랫폼의 위력 또한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애플과 삼성의 결정적 차이
이미 시장의 경쟁 구도가 ‘플랫폼 간 경쟁’으로 옮겨 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기존의 고객들은 스마트폰을 선택할 때 디자인이나 기기 사양을 먼저 따졌다. 제조업체의 브랜드가 중요한 선택 기준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기기를 선택함으로써 ‘어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를 먼저 본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툴(플랫폼)이 선택의 기준이 됐다. 자연스럽게 ‘구글의 안드로이드 대 애플의 IOS’ 대결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은행에서 ‘플랫폼 경제’를 강의하고 있는 문영배 나이스평가정보 CB연구소장은 “시장점유율로 보면 삼성과 애플은 엎치락뒤치락 비슷한 수준”이라며 “하지만 영업이익은 애플이 압도적인데 플랫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캐나다 투자 분석 회사인 캐너코드제뉴이티가 지난 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4분기 세계 스마트폰 제조사가 거둔 영업이익의 93%(194억 달러)를 애플이 독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2위인 삼성전자는 9%(18억 달러)였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너스 2%였다.
문 소장은 “삼성은 스마트폰 판매 이익의 대부분을 플랫폼 업체인 구글에 지불해야 하지만 애플은 스마트폰을 파는 만큼 이익으로 남는다”며 “플랫폼이 있는 기업과 없는 기업 간의 차이는 점점 더 극명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2013년 3분기 애플과 삼성의 영업이익은 56%, 52%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에서 ‘플랫폼 패권’을 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플랫폼을 가진 기업이 ‘시장의 룰’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최선 연구원은 “플랫폼을 가진 기업은 플랫폼의 룰을 설계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이 룰을 따라야 한다”며 “결과적으로는 플랫폼의 룰을 지배하는 기업이 전체 시장의 룰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2014년 2월 위메이드의 인기 게임인 ‘윈드러너’가 구글플레이에서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정확한 퇴출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업계에서는 위메이드가 구글의 결제 정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애플리케이션(앱) 장터인 구글플레이 초기만 해도 결제 시스템에 대해 별다른 통제를 하지 않던 구글은 2012년부터 자사의 결제(IAP) 시스템을 사용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구글플레이에서 앱을 삭제할 것이라는 방침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플랫폼을 가지지 못한 기업은 플랫폼을 가진 기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최병삼 연구원은 “참여자가 많을수록 더 많은 참여자가 모이게 되는 플랫폼은 한 번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 오랫동안 판도를 바꾸기 힘든 특성이 있다”며 “이 때문에 지금 글로벌 기업들이 벌이는 플랫폼 전쟁은 단순히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나 다름없다”고 의미를 짚었다. 그는 “이미 스마트폰처럼 플랫폼 패권이 정해진 시장도 있지만 아직 승자가 결정되지 않은 미개척지가 많이 남아 있다”며 “플랫폼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용어 설명
플랫폼(Platform) 다양한 종류의 시스템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공통적이고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기반 모듈, 어떤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제품·서비스·자산·기술·노하우 등 모든 형태가 가능하다.
운영체제(OS)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제어, 사용자가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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