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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블의 신데렐라' 수현,"기회를 잡은 건 행운이지만 잘 해내는 건 내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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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우 한경 텐아시아 기자) 2013년 11월 초. 영화 제목도, 배역 이름도, 줄거리 한 줄 없는 한 쪽짜리 대본이 수현의 소속사로 날아들었다. 시나리오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었다. “조지 클루니도 오나요?” 훗날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도 오나요?”로 알려지는 이 대사의 ‘조지 클루니’는 마블 스튜디오가 ‘어벤져스2’ 철통보완을 위해 내놓은 일종의 연막이었다. 수현은 자신의 손에 든 대본이 지난 2012년 전 세계 극장가를 집어삼킨 ‘어벤져스’ 속편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오디션에 응했다. 해당 대사를 읽는 수현의 모습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는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로 보내졌다. 블라인드 오디션 이후 몇 개월. 그 과정에서 자신이 마블의 영화 오디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수현은 그때도 ‘어벤져스2’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마블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앤트맨’이 아닐까 생각했다. ‘앤트맨’이 과학자를 내세운 작품이기도 했고, 마블 작품 중 아직 나오지 않은 작품이었으니까. ‘어벤져스2’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지막 오디션 현장. 토르라는 대사를 확인하고 당황하는 수현에게 마블 관계자는 말했다. “맞아. 토르야.”

어릴 때 미국에서 6년간 지내며 익힌 영어는 수현의 할리우드 입성에 좋은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녀 특유의 근성이었다. 조스 웨던 감독은 수현에게서 “위험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강인한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렇게 수현은 마블 세계에 입성했다. 아시아인이 할리우드 노른자위에 있는 빅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분명 일종의 사건이었다. 마블에 합류한 수현의 소식에 언론과 여론은 들썩였다. 하지만 뜨거운 스포트라이트 세례 속에서 수현은 침묵 할 수밖에 없었다. 마블은 수현의 캐릭터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아이언맨/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돕는 과학자’ 정도로만 알려진 그녀의 극중 이름이 ‘헬렌 조’라는 사실이 확인되기까지 꽤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Q. 캐스팅 소식은 전해졌을 때도 어떤 캐릭터인지는 알려지지 않아 무성한 소문이 돌았다.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에서도 당신의 캐릭터를 두고 추측성 기사를 내곤 했는데, 그런 걸 보면서 심경이 어땠나.

수현: 그때는 나 역시 걱정이 많았다. 캐스팅은 됐지만 ‘(이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출연한) 중국 배우들처럼 전형적인 아시아인의 역할에 그치진 않을까’, ‘그런 역할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한국 관객들이 많을텐데’라는 걱정을 했다. 주변 반응도 그랬다. ‘어벤져스2’ 일원이 된 걸 축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동시에 “장식적인 캐릭터일까봐 걱정이야”라고 날카롭게 지적해 주시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대본을 받고 난 후에 그런 고민을 털어냈다. 편집이 어떻게 되든, 참여했다는 것 자체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Q. 헬렌 조를 어떻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수현: 헬렌 조는 어벤져스 멤버들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당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천재 과학자 토니 스타크 앞에서 “이게(내 기술이) 바로 과학의 미래야”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 넘치는 애티튜드가 관건이라고 봤다. 그리고 할리우드 배우들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Q. ‘어벤져스1’이 개봉할 땐 뭘 하고 있었나.

수현: 그때 내가 뭘 하고 있었지…(매니저가 ‘브레인’을 찍고 있었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어머, 그랬나 보다. 워낙 마블 영화를 좋아했다. ‘어벤져스1’이 개봉했을 때도 캐릭터 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런 작품에 이렇게 출연하게 될 줄이야.(웃음)

Q. 마블의 어떤 캐릭터를 특히 좋아하나.

수현: 아이언맨, 그리고 (아이언맨 여자친구) 페퍼. 기네스 펠트로를 정말 좋아한다. 이번 영화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그녀가 출연하지 않아 아쉽다.

Q. 어릴 때부터 코믹스에 관심이 있었다고 들었다. 마블과 DC엔 여러 여성 캐릭터들이 있는데, 만약 초능력을 지닌 히어로를 연기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 보고 싶나.

수현: 코믹스에 여자 캐릭터가 굉장히 많다. 기회가 된다면 ‘엑스맨’에서 할 베리가 연기한 스톰을 연기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캐릭터다. 사실 ‘어벤져스2’에 캐스팅 되고 나서 가장 먼저 제작진에 물어본 것은 “원작에 있는 인물입니까”였다. 원작에 있는 캐릭터라고 하길래 많은 추측을 해 봤다. 위키피디아에 들어가 보고, 이전 마블 시리즈를 다시 보면서 캐릭터를 분석했다.

‘마블의 신데렐라’. 많은 언론이 수현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재미있는 수식어인 것 같다”고 말하는 수현은 “그게 꼭 나라서라기보다는 아시아인이 마블 유니버스에 들어갔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한국 동료들 뿐 아니라 외국 동료들도 신기해한다. 그런 면에서 신데렐라라는 수식어가 적합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한다. 수현이 언급한 외국 동료에는 미국드라마 ‘마르코 폴로’에서 함께 한 배우들도 포함돼 있다. 수현은 ‘어벤져스2’ 캐스팅 소식을 들은 며칠 후 ‘마르코 폴로’ 제작진들에게도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내가 가장 늦게 합류했다. 촬영장에 가기 전부터 배우들이 ‘‘어벤져스2’에 출연하는 그 배우 누구야?’ 굉장히 궁금해 했더라.” 그렇게 수현은 ‘어벤져스2’가 후반 작업을 하는 동안 ‘마르코 폴로’ 시즌1에서 칭기즈칸의 고손녀 쿠툴룬로 분해 먼저 미국 관객들을 만났다.

Q. 원하든 원치 않든 ‘어벤져스2’ 이후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그런 시선에서 느끼는 괴리나 부담은 없나.

수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만큼 부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기회를 잡은 건 행운이지만 그걸 잘 해내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감사하게도 미드 ‘마르코 폴로’ 시리즈 등 나를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생기고 있다.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Q. 내한 기자회견 때 보니까 마크 러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조스 웨던 감독과 가족처럼 느껴지더라. 실제 현장에서는 누구와 친했나.

수현: 현장에서는 마크 러팔로와 가장 많은 얘기를 했다. 마크는 크게 웃기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혼자 중얼중얼 작은 농담을 던지는 분이다. 따지고 보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 내 눈높이에 맞춰 늘 편안하게 대해줬다.

Q. 예상했던 것과 가장 달랐던 배우는?

수현: 크리스 에반스. ‘설국열차’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진지하고 조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먼저 와서 반갑게 인사를 해주고, 농담도 하는 등 굉장히 쾌활하다. 웃음소리가 특히 큰데, 촬영하면서 ‘아, 장난기가 많구나’ 느꼈다.

Q. 한국에 온 마크 러팔로가 갈비 집에서 올린 사진이 화제였다. 그는 ‘비긴 어게인’이 한국에서 크게 흥행한 걸 알고 있던가.

수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자신이 왜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지 못 믿더라. 환호하는 관객들을 보며 계속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놀라워했다. “한국에 자주 와야겠다”고 하더라.(웃음) 어쩌면 이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한국에서 누렸던 인기를 마크가 이번에 누리고 돌아간 것 같다.

Q. 토르와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극 초반 닥터 조가 “토르도 와요?”라고 묻는 대사에서 둘 사이에서 뭔가 있는 줄 알고 기대했는데, 토르가 바로 여자 친구 제인(영화 ‘토르’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 자랑을 팔불출처럼 하더라.(웃음)

수현: 아, 노벨상~하하하.(극중 토르는 아이언맨에게 제인이 노벨상을 탔다고 자랑한다.) 닥터 조가 “토르도 와요?”라고 묻는 대사의 경우 제작진이 ‘넣을까 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고민 끝에 넣었는데, 그 부분에서 관객들이 많이들 웃었다. 미국 에이전트들도 “너의 대사가 이 영화의 첫 웃음이었다”며 좋아해줬다. 크리스 헴스워스도 “우리, 나중에 뭐 있는 거야?”라고 궁금해 하고.(웃음) 헬렌 조에게 여러 가능성을 열어주는 대사라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다.

Q. 한국과 할리우드 시스템을 모두 경험했다. 배우들의 연기관이랄까, 차이점이 있나.

수현: 배우들의 연기관이 다르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할리우드가 한국영화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 특유의 심오함 등 한국 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한 번의 도약대다. 스타라는 관문에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결정적인 기회. 그랬을 때 수현의 점프는 올림픽 챔피언 감이다. ‘어벤져스2’의 출연이 수현에게 지니는 의는 많을 테지만 그 중 하나는 자신의 활동무대를 세계로 넓혔다는 점일 게다. 일찍이 김윤진을 필두로, 배두나, 이병헌, 다니엘 헤니 등 국내 배우들이 문을 두드려 온 기회와 모험의 땅.

Q. ‘어벤져스2’를 통해 활동 무대가 넓어졌다.

수현: 많은 선배님들과 감독님들이 진출해서 나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았나 싶다. (같은 소속사인) 다니엘 헤니가 미국 오디션을 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다면 엄두를 못 냈을 거다. 소속사가 미국 무대에 대한 이해가 더 깊기도 했고. 그런 걸 생각했을 때, 김윤진 선배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분은 기회가 먼저 주어졌다기보다 스스로가 직접 도전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존경스럽다.

Q. 김윤진 씨가 미국에 진출한 당시 할리우드에서 아시아 배우는 루시 리우(중국계 미국인) 정도가 활동했던 걸로 안다. 지금은 어떤가.

수현: 지금도 아시아 배우가 아주 많지는 않다. 루시 리우의 경우는 아시아인이라기보다는 그냥 미국인으로 보는 게 맞다. 실제로 그런 시선이 대다수고. 그런 면에서 김윤진 선배는 정말 대단하다는 거다. 루시 리우가 했던, 그러니까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역할을 지금 하고 계시니까. 드라마 주인공도 하시고.

Q. 김윤진과 사석에서 만난 적은 없나.

수현: 아쉽게도 아직은 없다. 이번에 미국 레드카펫을 밟기 전에 김윤진 배두나 선배님의 기사들을 찾아봤다.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배두나 선배의 경우 한국 시사회 무대인사에서 눈물도 보이셨더라. 보면서 ‘아, 저런 기분이시구나’를 느꼈다. 동양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힘든 일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섯 살 때 해외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6년간 미국에서 생활한 수현은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이 영화와 음악에 눈을 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일주일에 CD 10장, 비디오 1-2개 정도를 꼭 사 주셨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막연히 ‘예술 하는 사람이 되야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는 수현은 “목소리를 하는 직업에 끌렸다. 뭔가 자신의 목소리가 있다는 게 멋있었다”고 말한다. 앵커와 기자 등 미디어 쪽 일을 꿈꿨던 것은 그 때문. 하지만 2005년 한중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1위를 하면서 수현의 운명을 배우 쪽으로 슬그머니 방향을 틀었다.

Q. ‘배우가 내 길이구나’ 확신을 가진 건 언제인가.

수현: 2006년 ‘게임의 여왕’을 하고 나서 바로 차기작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그게 나에겐 오히려 위기였다. 뭔가 나의 모든 가치관이라든지 삶의 기준들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돈이나 유명세가 내 삶의 목표가 된 적이 없었는데, 그것들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중심이 흔들린 거다. 결국 고민 끝에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중단시켰다. 그러고는 3년을 보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거다. 쉬면서 영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직업의 제안을 받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그러면서 연기가 나에게 온 게 과연 우연일까. 어떤 뜻이 있어서 주어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다시 연기에 욕심을 냈다. 그때 마침 들어온 게 드라마 ‘도망자 Plan.B’였다. ‘도망자 Plan.B’를 하면서 ‘연기가 내겐 우연이 아니구나.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를 생각했던 것 같다.

Q. 연기를 중단했을 때 여러 가능성을 열어뒀던 건가.

수현: 맞다. 공부를 더 할까도 했는데, 공부는 또 하기가 싫더라고.(웃음) 그림 그리고, 음악 듣고, 여행을 다니며 3년을 보냈다.

Q. 10년마다 중요한 분기가 있었던 것 같다. 2006년 슈퍼모델이 됐고, 10년이 흘러 이렇게 마블의 일원이 됐다. 다음 10년이 궁금할 법하다.

수현: 또 10년의 기다림인 건가.(웃음) 글쎄. 10년 후에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는 김윤진 선배님처럼 미국 배우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무엇보다 그때쯤이면 아트필름을 많이 하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굉장히 상업적인 영화를 통해 이슈가 되긴 했지만, 큰 작품만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여러 경험을 통해 폭넓은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다.

Q.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마크 러팔로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에반스도 상업영화와 인디영화를 유연하게 오가고 있지 않나.

수현: 맞다. 프랑스 배우 마리옹 꼬띠아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특히 많이 한다. 그녀가 출연하는 디올 광고를 보면 ‘차도녀’ 중에 ‘차도녀’ 아닌가. 파리지앵 중에 파리지앵이고. 그런데 ‘내일을 위한 시간’ 같은 예술영화에도 출연한다. 얼마나 멋진가. 영어에 대한 핸디캡을 극복하고 할리우드에 안착했다는 점에서도 멋진 배우라고 생각한다.

Q. ‘어벤져스2’는 당신에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다.

수현: 사실 이렇게 빨리 해외 진출을 하게 될 줄 예상 못했다. 올해 내가 서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 묻는데, 글쎄. 개인적으로 연기를 보는 눈이 더 깊어지고, 연륜이 쌓이는 시기가 30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급함보다 기대가 더 크다.

‘어벤져스2’로 뜨거운 환호를 받은 수현은 ‘마르코 폴로’ 시즌2를 위해 다시 미국으로 날아갔다. 수현은 다시 몽골의 여전사가 되어 광활한 사막을 달릴 것이다. ‘마블 신데렐라’라는 유리 구두를 신은 채. 하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다. 12시가 되면 유리 구두의 마법은 끝난다는 사실을. 이후의 삶은 오롯이 스스로가 개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현의 다음 스텝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끝)

사진. 구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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