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소복에서 교복으로, 처녀귀신의 복색 변천사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이호영의 삐딱한 시선) 자살왕조에서 자살공화국으로-.

조선시대 이야기에 주로 나오는 테마는 귀신이다. 총각귀신 몽달이는 얼굴 없는 달걀귀신이다. 뭔가 코믹하고 어리바리하다. 점집을 주름잡는 동자신은 당돌해 보여도 엄마 찾는 애다. 뭐니 뭐니 해도 하얀 소복에 피 흘리는 처녀귀신이 왕이다.

자살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부동의 1위다. 마찬가지로 조선도 자살왕국이었다. 일본 강점기 때 역시 자살이 대세였다. 아마 우리나라의 오래된 ‘미풍양속’일지도 모른다.

조선에서는 대부분 효자와 열녀 그리고 처녀가 죽음으로 몰렸다. 일제 때는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청춘 남녀들의 동반자살인 정사(情死)가 이어졌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이 많이 자살한다. 심지어 나이든 기업 회장 아저씨까지 대열에 합류한다. 억울한 약자들은 죽어가지만 시대가 다르니 귀신도 다르다. 귀신의 복색도 시대에 따라 소복에서 교복과 양복으로 변했다.

처녀귀신 되는 법

유력가문의 망나니 아들은 가난하지만 예쁜 동네 처녀를 유린하고 버린다. 온 동네 소문나도 처녀에겐 항거할 길이 없다. 관아에 신고해보지만 늘 묵묵부답이다. 자살하는 방법밖에 없다. 한을 품고 죽은 처녀귀신의 흐느낌이 귀곡성이다.

사또에게 처녀귀신은 귀곡성으로 억울함을 호소한다. 하지만 받아먹은 게 찔리는 사또는 지레 겁에 질려 죽고 만다. 이러다 새로 부임한 젊은 사또는 귀신의 말을 듣고 나쁜 놈을 치죄하여 처녀의 한을 신원한다. 귀신 이야기라기보다는 받아먹은 게 없는 깨끗한 사또 선전이다. 조선 판 부정부패 방지 캠페인이라 하겠다.

일제 때 여학생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양반집에서는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평민들은 딸을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여학교도 몇 없고 여학생도 많지 않았다. 여학생이란 새로 나타난 희귀종이었다. 그러니 배재학당에 다니던 양반집 자제는 이화학당 여학생과의 연애가 꿈이었다. 한국판 연애의 비극이 여기서 시작한다.

일제 때 학교를 나온 여자라도 취직할 곳이 없었다. 사랑하는 남친과 알콩달콩 살고 싶지만 양반출신 남친에게는 이미 가문에서 정한 정혼자가 있다. 신분차이로 결혼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저 나이 많은 남자의 후처 자리밖에 없다. 벼랑 끝에 몰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동반자살인 정사를 택한다. 이게 일제 때 새로운 ‘종족’이던 여학생의 슬픈 결말이다.

21세기 한국의 귀신은 <여고괴담>같이 흥행한 영화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도 어린학생과 젊은 여성의 자살률이 가장 높다. 순결과 명예를 중시한 조선과 달리 학생귀신은 성적과 가정 그리고 학교생활을 비관하다 자살한다.

학생귀신은 불쌍하다. 처녀귀신이야 귀곡성 울리면 백마 탄 사또가 나타나 한을 풀어준다지만 학생귀신은 할 줄 아는 게 없다. 정사한 귀신은 같이 죽어줄 님이라도 있다지만 왕따로 죽은 학생귀신은 같이할 친구도 없다. 그저 학교 강당이나 아파트 놀이터의 어둠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신음한다.

소복에서 교복으로

비극적 죽음과 자살은 우리에게 도덕적 반성을 준다. 귀신의 복색이 이야기하는 바가 바로 우리의 양심이다. 조선의 하얀 소복은 관에 들어갈 때 입는 옷이 아니다. 원래 잠옷이었다. 하지만 순결을 상징하기에 하얀 소복이 처녀 귀신에게 더 어울린다. 조선에 이어 일제 때의 귀신은 예쁜 평상복을 입고 나타난다. 가장 아름다울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도시괴담에 나오는 학생귀신은 교복을 입는다. 그들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친구의 폭력으로 자살에 내 몰렸음에도 교복만 고집한다. 교복이란 학교의 규율에 대한 순응이자 부모와 선생님에게 보호받고 싶은 마음의 표시다. 아마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도 교복차림일 것이다.

여기에 분류하지 않은 하나가 더 있다. 양복 입은 비즈니스맨 경남기업 회장 성완종의 자살이다. 그도 억울하게 죽은 약자라고는 강변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메아리는 없다. 애도도 없다. 정치적 의미는 있지만 악취를 풍기는 오물 구덩이 같다. 그저 정재계의 더러운 커넥션과 오리발만 굴러다닌다. 그의 죽음은 양심의 정화와 도덕적 자성이 아닌 정치에 대한 환멸만 준다.

깊은 밤 학교 창고나 아파트 놀이터의 그늘을 유심히 보라. 교복차림으로 웅크리고 있는 희끗한 그림자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올데 갈데없이 불쌍한 학생귀신이다. 차갑게 외면하지 말고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아주자. /중앙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wesyuzna@naver.com(끝)

오늘의 신문 - 2024.06.29(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