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스물’ 동우(준호)와 경재(강하늘)의 실제 모델이 있는 걸로 안다. 명문대 갔다가 지금은 장교가 됐다는 경재란 친구와 큰아버지 공장에 취직했다는 동우란 친구가 이 영화를 봤는지 궁금하다.
이병헌: VIP 시사회 때 왔다. 정신이 없어서 직접 만나 얘기는 못했다. 영화 끝나고 문자를 보내왔는데 뭐라고 했지? (핸드폰 문자를 찾더니)“영화 너무 재미있었다. 우리 스무 살 때 생각이 너무 경재랑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와이프 때문에 헤어졌겠지, 뭐.(웃음) 다음에 만나서 술 마실 때 영화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지 않을까 싶다.
Q. 친구들은 자주 만나나.
이병헌: 각자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자주 못 본다. 어릴 때는 몰려다니며 별 짓을 다 했는데.(웃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젠 각자가 너무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오랜만에 만나야 재미있지, 자주 만나면 할 얘기가 없다. 나이 먹어서까지 섹스 이야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Q. 그럼, 지금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나.
이병헌: 친구들은 주식 얘기를 하더라. 나는 그 쪽엔 영 관심이 없어서. 평소에는 혼자 영화 보거나, 집에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한다.
Q. 치호(김우빈) 처럼?
이병헌: 맞다. 누가 돈만 주면 정말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있다.
Q. ‘스물’은 20대 때 초고를 쓴 작품이다. 30대에 다시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을 것 같다.
이병헌: 확실히 그런 게 있었다. 나는 그때의 고민이나 지금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물 때의 가장 큰 고민이라면 사랑-연애-섹스 이런 것일 텐데, 그런 고민은 30-40대들도 하지 않나. 유부남도 하는데, 뭐.(일동 웃음) 다만 그때는 그 고민이 크게 보였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거기에 얹어진 다른 고민들이 많기에 상대적으로 작아져 보일 뿐이다. 지금은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는 기술이 조금 더 늘었을 뿐이고.
Q. 과거를 돌아볼 때, 반성을 더 많이 하는 편인가 추억하는 편인가.
이병헌: 추억 쪽인 것 같다. 많은 인터뷰에서 “20살로 돌아가면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고 했는데, 솔직히 그건 그냥 한 말 같다.(웃음) 지나간 것들에 대해 후회를 안 하는 편이다. 학창시절에 공부 안 하고 논 거? 큰 후회는 없다. 실수로 돈을 잃어버렸다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고. 그런데 최근 핸드폰이 초기화 된 일이 있었다. 핸드폰 메모장에 아이디어들을 적어두는데 그게 ‘싹’ 다 날라 간 거다. ‘내가 기계 따위를 믿었다니!’ 하면서 3일을 끙끙 앓았다. 그 후회는 엄청 오래 했던 것 같다.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지워진 아이디어 중에 제2의 ‘명량’이 있었을지. ‘강감찬’ 이런 거.(일동 웃음) 그게 깡그리 다 날아갔으니, 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Q. 그래서 그 이후 아이디어 메모는…
이병헌: (핸드폰 가리키며) 또 여기에다…(일동 폭소)
Q. 학창시절 놀았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병헌: 학교를 진짜 싫어했다. 일단 선생님과 잘 안 맞았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학교를 그만 두려고도 했었다. 그때 그나마 좋아했던 게 그림이다. 좋은 대학 들어 갈 성적은 안 되고, 학교도 싫어하니, 막연하게 만화나 그릴까 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문제아가 만화를 그리겠다고 하니까 황당하셨을 거다. 미술학원에 다니겠다고 했는데 안 보내주셔서 치기어린 마음에 고3 졸업하자마자 홧김에 군대에 입대했다. 그런 어설프고 철부지 같은 게 있었다.
Q. 그래서 군에 다녀와서는 하고 싶은 걸 좀 찾았나. 국제통상학을 전공했는데.
이병헌: 대학은 집에서 가까워서 간 느낌이 살짝…(웃음) 제대하고 나서도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마냥 프리터 족으로 지내는 아들이 불안하셨을 거다.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 싶으셨던지 취업을 직접 알아보셨다. 집이 충남인데 지방에는 지역주민우선 채용이라는 게 있다. 마침 아버지가 대기업에 물품 납품하는 일을 하셨다. 한마디로 아버지를 통하면 취업은 어렵지 않았던 거다. “일단 졸업장만 따 와라. 그러면 네가 가지고 있는 빚을 모두 갚아주마”하는 조건을 거셨고, 그래서 대학을 갔다.
Q. 어떤 빚이었나.
이병헌: 술 먹다 생긴,카드 빚?(웃음)
Q. 그땐 영화를 하게 될 줄 꿈은 꿨나?
이병헌: 전혀 못 꿨지. 그땐 동네 양아치가 꿈이었다. 진심으로. (혼잣말)내가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지?(일동 폭소) 아무튼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긴 했다. 학교 안 가고, 극장에 가는 날도 많았다. 여자 친구와 비디오 방 가는 게 유행일 때였는데 나는 혼자서도 잘 갔다. 남자 랑도 가고.
Q. 그림에 대한 미련은 없나? 혹시 ‘스물’에 나오는 웹툰 ‘꼬추행성의 침공’ 그림을 직접?
이병헌: 아유~아니다. 그건 백봉 작가님 작품이다. 그 분의 그림체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아서.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병맛’ 코드를 가지고 계시다. “우와~ 애는 정말 미친놈이다. 나보다 더 미쳤다~”하면서 “빨리 섭외해라”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Q. 스스로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나?
이병헌: 어느 정도는. 미친놈이라기보다는 아주 보편적이진 않은 것 같다.
Q. ‘힘내세요, 병헌씨’ 때부터 느꼈지만 당신 영화의 장점은 역시나 대사다. 그런 소질은 어디에서 온 건가.
이병헌: 글쎄. 내 말투 안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떠들고 싶어 하는 내 안의 욕망도 있는 것 같다. 대사를 쓸 때 리듬을 잡으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대사의 길이나 속도, 타이밍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Q. 안 그래도 궁금했던 게, ‘스물’은 전체적으로 대사 치는 타이밍이 굉장히 좋다. 세 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연출이 잘 했거나, 배우들이 연기를 잘 했거나, 후반작업에서 편집으로 잘 살렸거나.
이병헌: 우린, 삼위일체?(웃음)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잘 했던 것 같다. 나 역시 디렉션을 할 때 대사 속도, 받아치는 타이밍 등에 가장 신경을 섰다. 생각했던 톤과 안 맞았을 때 조정해주고. 애드리브도 허용을 하되, 리듬이 깨진다 싶으면 얘기를 해서 빼거나 바꿔나갔다.
Q. 세 친구가 아지트인 소소반점에 모여 소동극을 벌이는 마지막 시퀀스는 ‘써니’의 데모 씬 오마주인가.
이병헌: 맞다. 사실 처음 계획한 것은 그냥 풀 샷이었다. 그런데 촬영을 해 보니 재미가 없더라고. 달리 아이디어는 없고. 그럴 땐 따라하는 게 최고지!(일동 웃음)
Q. 어마어마한 의미를 부여한 오마주인 줄 알았다.
이병헌: 처음 생각했던 버전이 너무 심심했다. 그래서 그렇게 바뀐 건데, 결과적으로 만족한다. 경재의 발차기가 ‘막 싸움’의 시작을 알리기에 더 할 나위 없었다고 본다.(웃음)
Q. ‘과속스캔들’ ‘써니’ ‘타짜’는 각색을, ‘네버엔딩스토리’ ‘오늘의 연애’는 각본을 썼다.
이병헌: ‘네버엔딩 스토리’와 ‘오늘의 연애’의 경우 몇 년 떠돌면서 각색이 워낙 많이 돼서 이젠 내 시나리오라고 보기엔 그렇다. 그게 5-6, 7-8년 전에 쓴 시나리오다. 당시엔 내 감성이 안 먹혔다. 투자하는 분들 눈에는 플롯이 너무 이상하거든. 이 시점에서는 울려주고, 남녀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도 하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으니까. 내 색깔이 조금 있었던 시나리오였는데, 각색이 되면서 이젠 내 시나리오 같지가 않다.
Q.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어느 순간 자기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 같다.
이병헌: 그러게. 그래서 작정하고 아예 전형적인 플롯의 로맨틱 코미디를 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이런 걸 말하는 거였니?’ 하면서.(웃음)
Q. ‘힘내세요, 병헌씨’의 경우 감독 지망생 병헌 씨(홍완표)를 통해, ‘스물’에서는 감독(박혁권)의 입을 빌어 영화계 생태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실제로 감독 준비를 하며 겪은 울분들이 투영된 것인가.
이병헌: 박혁권 선배가 연기한 감독 역시 ‘스물’의 친구들처럼 어떤 출발지점에 서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기성세대로서의 출발 지점에. 즉 감독은 스무 살부터 기성세대로 출발하는 지점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겪은 인물이다. 그래서 나른해 질 수밖에 없고 우울증과 조울증도 덩달아 느끼는 인물. 그런데 그런 모습이 부정적인 게 아니라, 어린애들이 봤을 때는 오히려 부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귀찮음보다는 능숙함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거니까. 치호가 감독의 엉뚱한 면모에 “X나 멋있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병헌감독04
Q. 중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서 ‘야설(야한 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고.
이병헌: 하하하. 대단한 소설을 쓴 건 아니다. 친구들이 써 달라고 하면 “(교과서) 줘 봐!” 한 다음에 여백에 야한 글을 써서 주곤 했다. 그러면 애들이 굉장히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보통 사람들 보다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긴 했던 것 같다. 군대에서도 ‘쫄병’들 연애편지를 많이 써 줬다. “왜? 무슨 사연이야? 편지 가져 와” 한 다음에 써 주곤 했다.
Q.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본인 연애편지는 잘 썼나.
이병헌: 잘 썼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들이 편지 써 주는 걸 너무 좋아해서 나중에는 결국 피곤해 지는, 그런? 그래서 헤어지고.(일동 웃음) 편지세대다 보니 편지를 많이 썼다.
Q. (핸드폰 바라보며)편지세대인데 문명의 이기를 믿다가 당하다니.
이병헌: 그러니까!
Q. ‘힘내세요, 병헌씨’에서 병헌 씨는 감독 제의를 받기는 하지만 이후 투자사로부터 자존심이 낱낱이 찢겨가는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강요받는다. 투자라는 큰 관문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많은 신인 감독들이 그런 상황과 마주하는 것으로 아는데, 당신은 어떤 점이 가장 힘들던가.
이병헌: ‘스물’의 경우엔 굉장히 좋았다. 처음 연출의뢰가 들어왔을 때, 신인 주제에 제작사 대표님께 “지금 플롯대로 안 가고, 중간에 자극적인 걸 넣는다든지 바뀌면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표님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 영화는 너 색깔대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해 주셨다. 시나리오를 투자사에 넘길 때 걱정을 하긴 했는데, 그때는 또 NEW가 그대로 받아줬다. 촬영 기간 내내 간섭도 거의 안 받았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
Q. 많은 감독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이다.
이 병헌: NEW가 아주 잘 한 거지!(일동 웃음) 트위터 평 중에 “이병헌 감독의 색을 건드리지 않은 게 신의 한수”라는 게 있었는데 그 말이 인상적이면서도 너무 좋았다.
Q. 동의한다. 당신이 단편 때부터 보였던 색깔이 상업영화 안에서도 살아있어서 개인적으로 반가웠다. 그래서 묻는데 스스로는 ‘이병헌의 색깔’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나.
이병헌: 특별한 건 없는 것 같다. 대단한 이야기를 가져다 쓰지도 않는다. 근처에 있는, 어찌 보면 진부할 수 있는 걸 가져다가 새롭게 리폼 하는 느낌이랄까. 내 유머 코드가 살짝 뒤 쪽에 나온다. 비트는 맛이 특징이라면 특징이 아닐까 싶다.
Q. 그나저나 무슨 자신감으로 제작사 대표님께 그런 말을 한 건가.
이병헌: 다른 거 하고 있는 게 있어서~(일동 웃음) 사실, 당시 입봉하려고 애를 엄청 많이 썼다. 초초해서 글도 많이 썼고, 여기 저기 발도 많이 걸쳐놨었다. 그런 시기에 오래 전 써놨던 ‘스물’이 불쑥 튀어나온 거다. 각색 초반에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수정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한 번 손을 대니까 생각보다 쓱쓱 잘 풀렸다. 그렇게 3개월 만에 각색본이 나왔고, 투자도 한 번도 됐다. 뭐랄까.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것 같다.
Q. 그때 한창 진행하던 다른 시나리오들은 어떻게 됐나.
이병헌: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들이 두 개 정도 있다. 20대 때 쓴 시나리오가 굉장히 많다. ‘써 놓은 것만으로 몇 년은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분위기가 ‘스물’ 덕에 만들어지는 것 같기는 한데…어디까지나 분위기일 뿐, 지켜보는 중이다.
이병헌감독05
Q.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만으로도 배부르겠다.
이병헌: 쉬지 않고 계속 달리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Q. ‘스물’ 세 친구의 대화는 ‘기-승-전-섹스’다. 당신이 생각하는 여성 최고의 미덕은 뭔가. 외모?
이병헌: 이제는 외모 같기도 하다. 20대 때는 친구들이 “너 취향이 살짝 독특하다”고 할 정도로 전형적인 미인 스타일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쁜 여자 밝혀!” 이런 소리는 안 들었는데, 어차피 여자는 다 나쁘니까 이제는 ‘아싸리, 예뻐라!’ 싶기도 하다.
Q. 하하하. 여자가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뭔가.
이병헌: 특별한 건 아니다.(웃음) 그냥 몇 번 부딪치고 헤어지고 하면서…
Q. 남자는 뭐, 나쁘지 않나.
이병헌: 뭐랄까. 남자를 곰이라 하고 여자를 여우라고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 같다. 거짓말을 잘 하는 동물이긴 하지만 바보 같은 면이 있어서 잘 들키는 게 남자라면, 여자는 안 들키려고 작정을 하면 정말 안 들키는 것 같다.
Q. 글쎄.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이병헌: 그런가. 내가 못된 여자만 만난 건가…(웃음)
Q.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영화 환경이 있다면.
이병헌: 간섭만 안 하면 좋을 것 같다. 영화 뿐 아니라 살면서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내버려 두면 잘 할 것 같은데, 간섭이 들어오면 괜히 삐뚤어졌다. 아… 그래서 내가 여자랑 잘 안 되는구나. 내가 문제구나~(일동 웃음)
Q. 하하하. 갑자기 자기반성을.
이병헌: 하하하. 나를 믿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환경이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스물’은 좋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