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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그리스의 국가부도 위기 대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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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심기 특파원) 국가부도 직전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경제수장이 과거 자신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전력이 있다면 그는 제대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그가 채권국과 구제금융 협상을 총괄하는 주무 장관이라면 과연 그에게 국가경제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리스라면 가능한 얘기일 것 같습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기카스 하도벨리스 전 재무장관이 그리스를 포함,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2012년 6월 HSBC은행을 통해 45만 유로를 해외로 송금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것도 56차례에 걸쳐 7000~8000유로씩 소액으로 쪼개서 보냈다고 합니다.

최근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탈세와 함께 사회 지도층의 해외도피 자금에 대한 대대적인 추적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 200여개국의 고액 자산가 10만여명이 맡긴 1000억 달러를 조세피난처를 통해 자금세탁을 한 뒤 스위스 은행의 비자금 계좌로 예치시킨 것으로 드러난 HSBC의 영업력이 그리스에서도 발휘된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도벨리스 전 장관의 태도입니다. 그는 “죄송하다”고 말하기는 커녕 “그렇다. 얼마간의 돈을 해외로 보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국가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며 당당히 자신의 ‘결백’을 밝혔다고 합니다.

자신은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리스 국가부도시 예상되는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과 이에 따른 예금지급 중단 사태나 화폐의 액면 단위를 바꾸는 리도미네이션에 따른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유로뱅크 이코노미스트 출신답게 자신의 전문성을 재산보호에도 유감없이 발휘한 것입니다.

물론 해외송금 자체가 불법은 아닙니다. 그는 탈세를 한 적이 없으며, 세금도 제대로 냈다고 덧붙였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는 2012년 당시 정부 관료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수개월 뒤 그는 루카스 파파데모스 총리 자문관으로 임명됐고, 이를 발판으로 지난해 6월 재무장관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해외송금 사실에 대해 ”(나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호주머니를 쳐다보지 않느냐”며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에 대해 억울하다는 투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하도벨리스 장관의 발언이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닙니다. 지난 1월 말 치러진 그리스 총선을 앞두고 시중은행의 예금은 122억 유로 감소했습니다. 한 달 새 기업과 개인의 예금 총액이 1480억 유로로 7.7%나 감소한 것입니다. 당시 좌파연합 시리자당의 대표였던 치프라스가 정권을 잡을 경우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할 것이라는 관측이 커지면서 개인은 물론 기업들도 ‘만약’에 대비해 유로화 예금을 인출해 현금으로 갖고 있었던 겁니다. 2월에도 예금인출은 지속돼 100억 유로 이상의 예금이 빠져나간 것으로 그리스 은행권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관부터 일반 국민들까지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한 그리스의 대처는 과거 한국이 보여준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한국은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자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불과 3년 반 만인 2001년 8월 구제금융을 모두 조기상환하고 IMF(국제통화기금)의 ‘신탁통치’에서 벗어난 전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에 이같은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sglee@hankyung.com(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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