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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보름달 보다 초승달을 선호했던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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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보름달과 반달에 대한 평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삼국시대 관련 문헌에선 만월(滿月)보다는 신월(新月)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6월의 기록이다.

“웬 귀신 하나가 궁중으로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하다가 이내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의자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깊이 3척쯤 되는 곳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있었다. “백제는 보름달이요 신라는 초승달 같다(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 이 글 뜻을 무당에게 물으니, “보름달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차면 기우는 것입니다. 초승달은 차지 않은 것이니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노해서 그를 죽여 버렸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보름달은 왕성한 것이고 초승달은 미약한 것이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진다는가 싶습니다. 이에 왕이 기뻐했다.(有一鬼入宮中 大呼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曰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王問之巫者 曰 同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月新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同月輪者盛也 如月新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寖微者乎王喜)”

왕조의 운명은 이처럼 정해져 있었다. 백제는 둥근달(滿月)이요 신라는 초승달(新月)이었던 셈이다. 보름달과 초승달의 대비되는 사고는 고구려의 멸망에도 적용됐다.

『삼국유사』의 기이편 보장봉로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조에 인용된 『고려고기』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전한다.

“고구려 28대 보장왕이 “불교와 유교만 있고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롭다”는 연개소문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나라에 도교를 청하니 당태종은 서달(敍達) 등 도사(道士) 여덟을 보내준다. 왕은 도교에 혹해 불사(佛寺)를 도관(道觀)으로 바꾸는 등 도교를 우대했다.

도사들은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며 (지기(地氣)를) 억눌렀다(진압했다). 옛 평양성은 지세가 신월성(新月城)이므로 도사들은 주문으로 南河의 용에게 성을 더 쌓게 해 滿月城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름을 용언성(龍堰城)이라 하였다. 또 예언서를 만들어서 용언도(龍堰堵) 또는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 하였다. 혹 영석(靈石)(세간에서는 도제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고도 한다. 옛날 동명성제(東明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에게 올라가 조회했기 때문이다)을 파내어 깨뜨리기도 하였다.(王喜 以佛寺爲道館 尊道士坐儒士之上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勅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俗云都帝]S 亦云朝天石 蓋昔聖帝騎此石朝上帝故也])”

적국의 도사들은 고구려의 왕성 신월성을 만월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구려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도사들이 깨뜨린 영석은 고구려왕이 하늘에 조회하던 조천석이었다. 왕과 하늘의 소통이 끊기면서 천제의 자손이었던 고구려 시조의 신성성은 파탄났다.

이같은 상징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도 적용됐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신월성과 만월성이 있었다. 신라 왕들이 이 두성에 거주하는 방식에는 필시 신월과 만월의 상징이 고려됐을 것이라는 게 이강래 전남대 교수의 추론이다.

정월대보름을 맞아 보름달과 관련된 조상들의 생각의 일단을 살펴봤다.(증권부 김동욱 기자)(끝)

***참고한 책***

이강래, 『삼국사기 인식론』,일지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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