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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지도자와 성인영화 소지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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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1229병의 고급와인, 11편의 포르노 영화, 호화판 해외 수입 의류들, 고무로 만들어진 자위기구 및 다량의 현찰.’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지도자였다가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총살이라는 형태로 숙청당한 부하린에게 씌워진 그의 ‘부도덕한 삶’을 드러내는 증거의 일부다.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부하린에게 1938년 행해진 요식행위 재판에선 국가 조사국에서 몰수한 부하린의 재산 목록이 130개 카테고리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가 ‘인민의 삶’과 동떨어진 “자본주의의 퇴폐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부도덕한 이중인격의 가식적인 인물이었고 사치를 일삼았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내용들이 특히 강조됐다. 일부는 사실일 테고, 일부는 과장되거나 조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농업의 기본구조를 단기간에 사회주의적으로 바꾸는 것은 힘든 만큼, 사영농업이 전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한 부하린은 농민과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행위가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결국 사회주의 국가경제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서슴없이 농민들에게 ‘부자가 되라’는 구호를 외쳤던” 겁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함께 트로츠키를 몰아낸 동지였던 스탈린에 대해 ‘같은 편’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권력을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려고 했고 1929년 11월이 되면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를 “당에 유해한 자들”로 지목해 비난하기에 이른다. 결국 부하린은 공개적인 자아비판을 통해 연명을 했지만 끝내 스탈린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반대파를 당에서 축출하는 ‘마일드 한’ 숙청을 했지만,1930년대 들어서선 반대파의 목숨을 물리적으로 뺏는 형태로 ‘하드하게’ 숙청작업을 진행했다.

1936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14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모두 처형됐다. 부하린과 리코프를 선두로 한 반대파도 역시 제거됐다. 이쪽 저쪽 가릴 것 없이 모두 제거된 것이다. 저명한 정치 인사들에 대한 공개재판이 빈번이 진행됐고 ‘트로츠키 주의자’ ‘지노비예프 주의자’ ‘우편향주의자’에 대한 색출 작업도 지속됐다.

결국 1934년 초 제 17차 공산당대회에서 활동했던 대의원 1966명중 1108명이 ‘반혁명’혐의로 체포됐다. 17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로 선발됐던 사람들 중 70%, 즉 139명중 98명이 1937~1938년도에 유명을 달리했다. 1933~1938년 사이에 공산당원 수는 3500만 명에서 1900만 명으로 감소했고, 수천 명이 당원이란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이어 숙청의 물결은 군대로도 퍼졌다. 1937년 발생한 여러 숙청 중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붉은 군대의 주요 장군들을 숙청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혹독한 고문 끝에 육군정치국위원 얀 가마르니크가 자살했다.

이어 붉은 군대 전반을 관통하는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이뤄져 ‘제대로 훈련받은’유능한 군사지도자들이 사라져갔다. ‘종심타격이론’으로 20세기 전쟁교범을 근본적으로 바꿨고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렸던 대전략가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유능한 장군들이 모조리 사라져갔다. 소련의 장군 5명중 3명, 군사령관 15명중 13명, 군단장 195명중 110명이 체포됐고 상당수가 처형됐다.(유능한 군 지휘관이 거의 사라진 결과,2차 대전 초기 소련군은 독일군에 크게 고전하게 된다.)

‘인민의 적’의 부인으로 분류된 숙청 장군과 장교들의 부인들 역시 자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38년 8월29일 ‘인민의 적의 부인’으로 지목된 15명의 여성들이 총살형을 당했다. 다만 저명 인물들이었던 투하체프스키, 유보레비치, 코르크, 가마르니크의 미망인들은 목숨을 부지한 채 8년형에 취해지는 배려를 받았다. 그나마 니나 투하체프스키 등 이들의 부인들은 1941년 2차 대전 중 총살형에 처해진다.

숙청대상자가 된 이들의 자식들도 비슷한 운명에 처해져서 1937년 8월 15일 칙령에 의해 15세 이상 되는 자녀들은 그들의 어머니들과 동일한 처분을 받아야만 했다. ‘사회적으로 위험한 아이들’로 찍힌 이들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고, 1~1.5세가량의 어린 아이들만 그들의 어머니와 같은 수용소에서 살 수 있었다. 그나마 열악한 수용소의 환경으로 어린 유아들의 생존확률도 높지 않았다. 1943년 전쟁 중에도 일반 굴락(Gulags)에서 일반인의 영아사망률이 0.47%였던 반면 어머니가 죄수인 아이들의 사망률은 무려 41.7%에 달했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로이 메드베제프에 따르면 이 대숙청 기간 동안 다수의 사망자(1500만 명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도 제시된다.) 외에 900만~1100만 명의 농민이 토지를 잃고 시베리아로 추방됐다고 추산된다. 소련의 공식기록으로도 1927년부터 1939년까지 기근을 포함한 각종 사유로 인한 인구 손실은 12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숫자에 대한 논란은 없지 않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고통 받았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얼마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가 괴한의 권총에 피격돼 사망했다. 러시아 정보당국이 피살 당시 넴초프와 함께 있었던 우크라이나 출신 모델과의 ‘치정’을 부각시키려 한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전형적인 러시아식 정적에 대한 ‘피의 숙청’과 도덕성에 흠집내기 방식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몇자 적어봤다. (김동욱 증권부 기자)(끝)

***참고한 책***

Robert Conquest, 『The Dragon of Expectation-Reality and Delusion in the Course of History』, Norton 2006

헬무트 알트리히터, 『소련소사 1917-1991』, 최대희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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