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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이야기①배 이름만 보고 주인을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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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산업부 기자) 무궁화, 아카시아, 카르멘, 루스벨트의 공통점은?

얼핏 상관없어 보이는 이 단어들은 모두 초대형 선박의 이름입니다. 아기를 낳은 부모가 이름을 짓기 위해 몇날 몇일을 고민하듯, 선주들 역시 배의 출항일이 다가오면 어떤 이름을 지을까 생각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해운사 중 대한해운, 일본의 재팬라인사 등은 자스민, 아카시아, 무궁화 등 배를 꽃 이름에 비유해 이름을 짓습니다. 도시명, 오페라의 제목을 따서 짓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래서 배 이름을 보면 어느 회사 소 만든 배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도시 이름을 그대로 가져오는 해운사는 한진해운입니다. 한진해운은 초창기 한진뉴욕호, 한진함부르크호, 한지평택호 등 기항지를 중심으로 이름을 짓다가 한진런던호, 한진베를린호, 한진시드니호 등 각국의 수도 이름을 따서 배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예외도 있습니다. 한진해운의 1호선은 ‘정석호’ 입니다. 조중훈 창업주의 호를 딴 이름이죠.

현대상선은 초기 현대 1호선부터 23호선까지는 숫자로 배 이름을 짓다가 이후 도전적인 이미지를 담은 이름을 주로 지었습니다. 거친 바다를 뚫고 전 세계 바다를 누비는 회사의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했다는군요. 현대상선이 소유한 배의 이름은 자이언트호, 아틀라스호, 유토피아호, 밀레니엄호, 인디펜던스호, 프리덤호, 디스커버리호 등 남성적이고 웅장한 이름이 많습니다.

외국 해운사들은 개성이 더 강합니다. 미국 셸(shell)사는 회사 이름처럼 조개껍데기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배 종류에 따라 머리글자를 달리해 이름 붙이고요. 퇴역하는 배의 이름을 새로 지은 배에 다시 붙여 이름을 ‘대물림’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뮤렉스호’라는 배는 벌써 4대째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배의 평균 수명이 25~30년임을 감안하면 ‘뮤렉스’는 100년 넘게 바다를 항해한 셈입니다. 미국 APL사는 워싱턴호, 루스벨트호 등 역대 대통령 이름으로, OSG사는 플루토(명왕성), 새턴(토성) 등 천문용어를 선호하는 회사로 유명합니다.

‘오페라 선단’으로 불리는 회사도 있습니다. 오페라 주인공의 이름으로만 배 이름을 짓기 때문인데요. 스웨덴의 왈레니우스사는 왈레니우스호, 아이디호, 티투스호, 카르멘호, 돈 주앙호 등 모두 오페라 이름을 배에 붙였습니다. 창업주가 오페라 마니아였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리스 신화 속 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회사도 있습니다. 그리스 회사 아르고나사 입니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팔라스, 아폴로의 구애를 뿌리친 요정 라프네 이름을 붙여 아르고팔라스호, 아르고 라프네호 등으로 지었습니다.

선박 이름에도 징크스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해운업계에는 배 이름에 바다를 뜻하는 ‘시(sea)’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늘, 땅, 바다는 신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함부로 다른 이름에 쓰지 않는다는 풍습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 시프린스호가, 영국 북해에서는 씨 엠프레스호가 좌초된 적이 있었죠.

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름은 절대 짓지 말라는 건 역사상 최악의 침몰 사고로 기록된 타이타닉호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당시 그리스 신화의 타이탄에서 이름을 따와 타이타닉으로 이름 지은 이 배는 아예 ‘신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God himself could not sink this ship)’는 문구를 넣어 광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5.10.04(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