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총선에서 낙선한 직후 은퇴결심을 굳혔으나 대통령선거를 포함해 몇개 선거와 전당대회 등을 당 이벤트를 챙기느라 다소 늦어졌다고 했다. “다음 총선이면 75살쯤 되니까 또 하면 노욕(老慾),노추(老醜)가 아니냐"며 정치에 대한 미련을 털어냈다.
그에게 25년 정치인생에서 가장 큰 회환으로 남은 사건들은 무엇일까.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국가보안법 개정 무산’,‘조문파동’,‘김대중(DJ)-김영삼(YS) 단일화 실패'를 꼽았다.
2004년 낙선으로 원외에 있던 이 고문은 정동영 전 의장에 이어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의장에 취임했다. 당 대표 경선에서 3위를 했지만 두명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의를 표명해 의장직을 승계한 것이다. 당시 절대 다수당인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법안을 당론으로 정해놓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해직기사 출신으로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다섯번의 옥살이를 했던 이 고문은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안법 폐지에 의욕을 불태웠지만 전반적인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한나라당이나 보수단체들이 명운을 건 결사저지의 태도를 보였고,열린우리당이 공개공천을 통해 흡수한 소속의원들 중 상당수도 국보법 폐지 반대론자로 분류돼 국회 본회의 표결통과 가능성도 희박했기 때문이다.
이 고문은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천정배 김덕용 당시 여야 원내대표와의 4자 비밀회동을 통해 천신만고끝에 합의안을 이끌어냈다. 폐지대신 국가보안법이 명시하고 있는 찬양고무,불고지.회합통신 등 5개 독소조항을 제거하는 개정안을 우선적으로 통과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고문은 “5개 독소조항만 제거하면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무력화됐을 것이고, 현재의 남북관계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개정안이 통과됐으면 보수우익들의 반발로 박근혜 대표가 불명예 퇴진할 수 밖에 없고 대권행보에도 제동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4자간 합의사실이 전해지면서 당이 발칵 뒤집혔다. 유시민 정청래 임종인 등 당내 개혁파 의원들은 농성을 벌이면서 강력 반발했다.
이 고문은 “여당이 국회에서 농성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상상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고문은 당시 개혁파중 한명인 유시민 전 장관을 의장실로 조용히 불러 설득도 해봤다. 현재 정치적 상황을 비롯해 개정안이라도 통과시켜야 하는 명분까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고문은 당시 유 전 장관이 개정안을 끝내 반대하면서 툭 던진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가 가능하겠냐"는 질문에 유 전 장관은 “지금 못하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계속 집권할텐데”라고 말했다.
4자 지도부 회동을 통한 합의안은 천정배 원내대표가 갑자기 국보법 폐지쪽으로 돌변하면서 휴지조각이 됐다. 이 고문은 이후 천 전 장관과 마주하기를 꺼렸고, 지금까지도 그가 태도를 바꾼 속내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둘은 국보법 폐지실패 동반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진했다.
이 고문은 “10을 얻을려는 과욕으로 오히려 아홉을 잃는 우를 범했다"며 “10년이상 국가보안법 한 줄도 못고치고 있는 정치인은 모두 역사의 죄인"이라고 말했다.
1994년 민주당의 국회 외통위원회 소속이었던 이 고문은 김일성 주석 사망때의 ‘조문파동'으로 정치인생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자신과 가족이 곤욕을 치렀지만, ’조문파동‘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된게 이 고문에게 더 가슴아픈 대목이다.
이 고문이 외통위에서 “혹 정부가 조문 의사를 표명할 용기가 있느냐"고 질의했다. 하지만, 김 주석 사망후 남침설이 제기되는 등 긴장국면에서 일부 보수 언론들이 질의 앞뒤를 생략한채 ‘6·25를 일으킨 전쟁범죄자에게 조문을 강요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메카시즘 광풍이 몰아쳤고, 이 고문은 순식간에 종북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이 고문은 “양국 정상회담이 날짜까지 정해진 상황에서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된게 너무 안타까웠다"며 ”조문으로 관계회복의 실마리라도 이어가자는 충정의 발로였는데 오히려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빌미가 돼 버렸다"고 토로했다.
이 고문은 반북(反北)세력의 공공의 적이 돼 생명의 위험에 시달리는 등 말 못할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 고문은 “국회의원 신분에도 불구 대한민국이 개인의 생명이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 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퇴역 상이군인을 포함해 수 많은 단체들이 지역당 사를 점거하면서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고,자택에는 시도 때도없이 돌들이 투척됐다고 전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