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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의 '대권'꿈과 현실사이..이회창의 길이냐 정운찬의 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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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태 정치부 기자,국회반장) 정치권 예상대로 이완구(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불리는 국무총리에 내정됐다. ‘뱃지'출신들에 관대한 국회의 인사검증 관행상 인사청문회도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신임 총리가 영남에서 호남으로 권력이동때마다 ‘캐스팅 보트’를 행사했던 충청권 출신인데다 이완구의 정치적 위상을 감안할때 여권내 대선주자간에도 지형변화가 예고된다. 김종필 전 자민련총재, 이회창 선진당 대표, 이해찬 의원,정운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 이어 ‘국정 2인자’자리에 오른 그는 단숨에 대권가도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충청도민들은 15대 대통령선거에서 35만표차로 석패한 이회창의 대권 꿈을 좇을 적임자로 이완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이회창의 패배를 DJP연합및 동향출신 이인제 의원의 출마강행(500만표 득표) 등으로 인한 자중지란으로 애석해 하는게 충청권의 민심이기 때문이다.

이완구는 총리지명직후 “어제 저녁 늦게 연락받고 밤잠 설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 아침에 많은 생각 끝에 대통령 잘 보필해서 국가와 국민위해 이 자리가 제 공직의 마지막 자리라는 각오와 함께 수락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이미 ‘2PM(이완구+Prime Minister)’이란 하마평이 파다했던데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그의 지속적인 ‘눈도장 찍기’정황을 아는 이들에게 그의 수락의 변(辯)은 무미건조한 정치적 레토릭(rhetoric)으로 비쳐질 뿐이다.

행정고시출신으로 1995년 정계에 입문한 이완구는 15,16대 국회의원을 거쳐 2006년 충남 도지사에 당선됐다. 그가 2009년 도지사직을 내걸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한 것은 정치적 승부수였다. 결국 지사직을 내려놨지만 박 대통령의 확실한 눈도장과 함께 ‘뚝심 정치인’이란 명성을 얻으며 실리와 명분을 챙길수 있었다.

지난해 5월 원내대표에 당선된후에는 박 대통령의 눈에 ‘쏙’ 들만한 정치력과 국정보좌 능력을 증명했다. 유가족과 야당의 결사반대속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무력화시킨 세월호특별법을 관철시켰고, 새해 예산안 시한처리,부동산 3법 통과 등 집권당 원내대표로서 공적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이 과정에서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대표 등과 ‘척’을 지거나 갈등을 빚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원내대표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평가와 함께 ‘총리 감투’를 거머쥐기 위한 고군분투쯤으로 폄하하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나오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이완구는 지명직후 “대통령에게 직언하고 쓴소리하는 총리가 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은 정치권에는 없다. 박 대통령의 스타일이나 그의 정치적 행보를 반추해볼때 둘이 대척점에 서는 장면을 상상하기 힘들어서다.

정치권은 이완구의 대권가도에서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 변수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총리직을 제안받으면서 전철을 밟았던 두 충청권 거물 정치인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이회창 선진당 대표와 정운찬 명예교수이다.

충남 예산 출신인 이회창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첫해인 19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정권의 ‘얼굴 마담’이나 ‘방탄 조끼’ 역할을 수행했던 역대 총리와 달리 이회창은 자신에게 주어진 법적권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강성총리’의 모델을 제시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최형우 내무부 장관에게 면전에서 거침없이 호통치는가 하면 청와대와도 수시로 충돌했다. 결국 그를 부담스러워한 김 전 대통령이 사임 형식으로 해임하려 했고, 이회창은 되레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취임 127일만에 사표를 던졌다. 이런 행동은 ‘대쪽’이라는 별명을 안겨줬고, 비록 고배를 마셨지만 2번의 대권 유력주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충남 공주 태생인 정운찬은 이명박 정부 출범 2년차인 2009년 9월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총리에 임명됐다. 총리에 지명된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현안이었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했고, 이는 재임 내내 정 전 총리의 발목을 붙잡는 악재로 작용했다. 정운찬은 이듬해 1월 세종시를 행정도시가 아닌 과학비즈니스벨트로 만들겠다는 수정안을 공식 발표했고,이 과정에서 자신의 고향인 충청권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당시 충남지사였던 이완구가 지사직을 내놓고 원안 사수 투쟁을 벌였다. 이 와중에 정운찬이 ‘박근혜 대항마’로 청와대가 전략적으로 영입한 카드였다는 설이 퍼지면서 여론의 거센 역풍에 휩싸였다.

그해 6월 국회 본회의에서 세종시 수정안은 당내 친박계의 반대표로 부결됐고,두달뒤 정운찬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세종시 수정안을 위한 ‘원포인트 총리’였다는 오명과 충청권 정치적 기반까지 잃은 그는 자연스럽게 대권주자명단에서 퇴출됐다.

이완구는 총리지명과 함께 여권의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섰다. 그의 정치이력 뿐만 아니라 ‘결벽증’에 가까운 처신에서도 대권을 향한 꿈은 읽혀진다. 철저한 주변관리는 주변에 정평이 날 정도다. 큰아들 혼사를 주변 지인은 물론 비서진에도 알리지 않았고, 혹시 축의금이 들어올까봐 사후에도 쉬쉬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모상을 당했을 때는 신문 부고란에 자신의 이름을 빼도록 했고, 충남도지사 시절 도청 이전 후보지 일부를 과거 증조부가 사들여 아버지에게 상속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보상금을 곧바로 국가에 기증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이완구는 이회창과 정운찬 등 실패한 선배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을 대신해 ‘매맞는 소년'으로 비아냥을 받았던 정홍원 총리의 후임자로서 그의 선택지가 많지는 않을 것이란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대통령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이회창의 길이냐, 아니면 대통령의 ‘총대’를 맸던 정운찬의 길이냐.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 이완구의 ‘일거수 일투족’에 정계의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대권주자 반열에 오른 그의 정치적 명운 때문이 아니라 집권3년차 원내대표출신 총리의 위상에 따라 당청,여야관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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