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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원액기 만든 휴롬 회장의 창업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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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광/김용준 중소기업부 기자) "영기야, 영기야."어머니는 시시때때로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 영기를 찾았다. 무언가가 고장났거나, 칼이 잘 들지 않을때였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소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어김없이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들려 있었다.

영기의 손을 거치면 부러진 손잡이가 새것이 됐고, 버려진 물건은 유용한 물품으로 바뀌었다. 어른들은 영기에게 뚝딱대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필요한 것을 뚝딱거리며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뜻이었다.

뚝딱대장 영기는 그로부터 45년 후 혼자 힘으로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매출 3000억원을 올리는 회사의 회장이 됐다. 그가 만든 제품은 원액기 또는 쥬서로 불린다. 휴롬 김영기 회장 얘기다. 그는 말한다. "나는 별다른 취미가 없다. 어렸을때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개발은 취미이자, 일이고, 특기다."

◆중국인들까지 사로잡은 제품 지난해 11월11일. 중국판 블랙프라이데이로 불리는 광군절(光棍節, 독신자의 날)이었다. 이날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 티몰(T-Mall)에서 휴롬 쥬서는 시간당 400대씩 팔려나갔다. 같은 날 다른 가전 전문몰에서도 휴롬 제품은 불티나듯 팔렸다.

하룻동안 휴롬은 중국 전역에서 2만대의 쥬서를 판매했다. 기존 믹서나 녹즙기와 달리 서서히 눌러서 짜는 쥬서 열풍이 한국을 넘어 중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 날이었다.

중국시장 성장 덕에 휴롬 매출은 지난해 3000억원을 돌파했다. 쥬서 단 하나의 제품만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김 회장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보겠다고 녹즙기 개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수십년을 투자한 결과"라고 했다.

부산 경남고와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김 회장은 취직대신 창업을 택했다. 당시 국내 전자업체들은 일본에서 거의 모든 부품을 들여다 TV를 조립해 팔고 있었다. 그는 "일본사람들이 하면 나도 할수 있다"는 생각으로 국산 부품을 만드는 회사를 차렸다. 1974년 일이다. 직접 만든 제품을 금성사(현 LG전자) 등에 납품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노력을 평가해주지 않았다.

대기업들은 그저 하청업체로 하인 부리듯 했다. "요즘은 협력업체라고 해서 시늉이라도 하지"라고 그는 말했다. 엔지니어 김영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남들이 만든 것을 따라해봐야 별볼일 없다고 생각한 계기였다. 서양인(선진국)들이 만들지 않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그의 머리에는 몇가지 생각이 떠돌아다녔다. 서양에 없는 것이 무엇일까가 가장 중요했다. 또하나는 건강이었다. 폭음을 하는 한국의 술문화 때문에 힘들어하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일부 주부들은 케일, 신선초 등을 갈아 남편에게 먹였다. 이런 문화가 확산될 즈음이었다. 서양에 없는 것과 건강이라는 키워드가 그의 머릿속에서 합쳐졌다. 여기에 또하나 그가 평소 심취해 있던 자연이라는 키워드가 생각의 범주안에 들어왔다.

그는 말한다. "인간은 미물이다. 자연은 모든 것을 관장한다. 인간의 건강도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음식을 섭취했을때 가장 좋아진다"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동양 또는 한국, 자연, 건강이 키워드가 됐다. 이 아이디어로 기계로 만들면 사람들 건강에도 좋고 잘 팔리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한양제조법이었다. 찧거나 짜서 먹기 때문에 영양소를 파괴하지 않고 자연에 가까운 상태대로 섭취할 수 있게 해주는 제조법. 이와닮은 기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확신과 열정의 대가는 희열 쉽지는 않았다. 그는 "7전8기가 아니라 수천번 실패를 반복하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구상한 것을 도면으로 그리고, 선반으로 깍고 가공해서 만들고 또 만들었다. 하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직원들이 쓸데없는 짓 한다고 생각하더라고. 대기업 가서 일감이나 가져오면 월급이라도 많이 줄텐데 하면서 말이지"라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제품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루종일 기계를 만들다 집에 와 실험하다 잠자리에 누워도 그 생각뿐이었다. 새벽에 잠이 깨면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곧바로 도면을 다시 그려 회사로 나가 또 만들었다. 10년간 그렇게 했다. 그는 지금도 개발자들에게 "아침에 눈을 뜰때 아이디어가 가장 많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몰입의 결과다. 몰입은 나와 세계가 생각을 통해 만나는 과정이다. 그 결과물은 "문득 깨달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도전에 대해 그는 "수천번 만들고 부수면서 조금씩 개선되는 것을 느꼈다. 그 쾌감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개발중독자들이 하는 얘기다. 자연은 무언가 노력해 성취를 이뤘을때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대량분배케 함으로써 만족감이라는 선물을 준다. 개발자들이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연구실에 틀어박히는 이유는 작은 성취에는 소량의 도파민이, 큰 성취에는 대량의 도파민이 선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도파민 중독이라고 할수 있다.

김 회장은 이런 과정을 거쳐 1990년대 중반 녹즙기 개발에 성공했다. 반응도 좋았다. 녹즙기로 채소나 과일즙을 내 마셨더니 불치병이 나았다며 자료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김 회장에게 마케팅에 활용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료를 조용히 서랍에 넣었다. “약장사라고 할까봐 자료는 서랍에 넣어뒀지만 사업이 잘 될거란 더 큰 확신이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곳곳에서 짝퉁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저가 저질 제품이 넘쳐나며 시장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녹즙기에서 중금속이 나온다는 내용이 방송에 보도됐다. 쇠끼리 부딪치면서 나오는 쇳물이 문제였다. 건강을 챙기려고 산 제품이 건강을 더 해친다는 사실에 소비자들은 분노했다.

이 방송을 접한 김 회장은 쾌재를 불렀다. 기어를 두개 쓰는 쌍기어 제품이 문제였기 때문에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 것은 기어가 하나여서 문제될 게 없었다”며 “드디어 내가 빛을 보는구나 했다”고 말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분노한 소비자들에게 기어가 몇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녹즙기=중금속 공식이 확산되며 시장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배신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향해 여기서 멈출 김영기가 아니었다. 몇년간 또 개발실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새로운 제품을 내놨다. 2000년 나온 오스카 만능 녹즙기가 그것이다. 녹즙뿐 아니라 양념도 갈고, 떡도 만들수 있고, 국수도 뺄수 있는 다용도 제품이었다. 당시 CJ39쇼핑은 2000년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이 녹즙기를 선정했을 정도로 잘 팔렸다. 2000개 판매 품목중 1위에 올랐던 것으로 김 회장은 기억하고 있다. 성공하나 싶었지만 또다른 걸림돌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배신이었다. "영업소장 하던 한 직원이 똑같이 만들어서 자기가 직접 홈쇼핑에 나와서 팔기 시작했지." 소비자들은 이 제품을 김 회장이 만든 제품인 줄 알고 샀다. 그는 소송으로 맞섰다. 몇년간 소송에 전력하는 사이 수요는 점차 줄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주변의 권유로 그는 소송을 취하했다. 취하할때 보니 소송건수만 26건에 달했다.

이 사건에 대해 그는 "세계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이라는 작은 시장에서 치고받는 것은 의미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다음 제품 콘셉트는 분명했다. 글로벌이 핵심 키워드였다. 채소보다 과일을 갈아 먹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서양인들의 식습관을 감안해 제품을 만들었다.

채소뿐 아니라 과일에도 최적화된 스크류를 개발했다. 회전을 천천히 시켜 지그시 짜는 듯한 효과를 내게 했다. 한약재를 짜는 것처럼 만든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그대로였다. 이를 통해 과일이나 채소의 영양소를 덜 파괴하고, 재료 특유의 색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건강에 더 이로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은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 그는 "대포처럼 생긴 녹즙기가 아닌 디자인감각을 담아 만든 것이 지금의 휴롬이다"라고 설명했다. 2008년 일이다. 이후 휴롬은 웰빙 바람을 타고 쭉쭉 성장했다.

◆완벽한 회사를 만들고 싶은 꿈
그는 성공과 실패 그리고 성공을 반복하면서 브랜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5년안에 휴롬이란 브랜드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하면 회사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유사제품에 밀리지 않으려면 강력한 ‘브랜드 파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과거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그래서 물, 설탕, 얼음을 일절 쓰지 않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 원액만 쓴 주스를 파는 ‘휴롬팜’이란 주스카페도 만들었다.

올해부터는 이를 용기에 담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팔수 있게 할 계획이다. “휴롬주스는 몸에 좋은 효소가 살아 있어 만든 뒤 12시간 안에 마셔야 한다. 냉장해도 24시간밖에 안 가기 때문에 안팔리는 것은 다 회수해 폐기하겠다”라고 말했다. 기계만 파는 회사가 아니라 건강을 파는 회사로 자리잡고 싶다는 게 그의 목표다. "먼 훗날 휴롬때문에 인류의 평균수명이 몇년 늘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김 회장에게는 또하나의 계획이 있다. 완벽한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일하고 죽을때까지 회사가 책임져주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준비중"이라고 했다. 현재 공장을 더 큰 부지로 옮겨 협력업체들도 다 불러들이고 유치원, 탁아소 등을 짓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건물에는 요양원을 만들 계획이다. "평생 회사를 위해 일한 사람들이 편히 갈수 있도록 좋은 요양시설을 만들 생각"이라고 했다.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조언을 부탁하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는데 평생을 걸면 뭔가 해낼수 있다. 쉽게 하려고 하거나, 남 잘된다고 따라가다 보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올해 매출 목표를 물었다. 그는 "5000억원"이라고 답했다. 작년보다 60% 늘어난 수준이다. 중국판매가 계속 늘고 있어 무리가 아니라고 했다. 품목도 다양화 하기로 했다. 회전 기술을 활용한 주서, 믹서기, 블렌더 등도 개발중이다. 그는 "쌍둥이칼로 유명한 독일 헹켈처럼 소형 주방가전의 독보적 브랜드로 자리잡고 싶다"고 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0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