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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미생들의 '흡연 골목'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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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산업부 기자) “장그래, 라이터 있냐? 영업하는 놈이 불도 안 갖고 다녀!”

얼마 전 막을 내린 화제의 드라마 ‘미생’. 극중 오성식 과장은 뭔가 일이 안 풀릴 때마다 옥상에 올라갑니다. 탁 트인 하늘과 노을을 보며 담배 한대 피우고 나면 그의 눈빛도 좀 달라지죠. 오 과장의 미생을 완성시켜 가는 주요 동력은 귀여운 자식들과 담배 한 개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부가 흡연율을 낮추겠다며 담뱃세를 인상하면서 오 과장 같은 대한민국 미생들의 근심은 더 깊어졌습니다. 건물 내 금연으로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야 하는 데다 지갑까지 얇아지게 생겼으니 말이죠.

비싼 담배 사들고 길거리로 내몰린 미생들. 이미 서울 시내 곳곳에는 애연가들이 주로 모이는 ‘너구리굴’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마시는 담배 연기란 오 과장만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가장 엄격하게 금연 정책을 펴는 회사 중 하나는 포스코입니다. 2000년대 초부터 포항과 광양제철소를 중심으로 금연을 실시해왔고, 작업장에 담배와 라이터를 반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정준양 전 회장 시절인 2009년부터는 아예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가 ‘그린빌딩’으로 선포됐습니다. ‘흡연율 제로’를 목표로 사내는 물론 사외에서도 담배를 못 피우게 했고, 소변 검사나 피검사로 흡연 여부를 가리는 등 금연 정책을 강하게 밀어부쳤습니다.

권오준 회장이 지난해 취임한 이후로는 금연이 강제사항이 아니라 권고사항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린빌딩 정책은 여전히 유효해 포스코센터 건물 전체는 물론 건물 주변 도로까지 금연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포스코 직원들은 그럼 어디가서 담배를 피우냐고요? 인근의 동부금융센터 뒷골목을 보시면 됩니다. 이 건물에 있는 동부제철 직원들과 한 데 섞인 포스코 애연가들은 열심히 연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강북에는 강남보다 골목이 많다보니 너구리굴도 많습니다. 광화문에는 대우건설 건물 뒤로 ‘ㅋㅋㅋ담벼락’이 유명합니다. 누가 낙서를 했는 지 모르지만 대우건설 뒤 담벼락에는 ‘ㅋㅋㅋ’라는 검정색 글씨가 크게 써있는데요. 건물 내 금연이 시작되면서 시간과 상관없이 몰려나온 직장인들은 담벼락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곤 합니다. 몰래 피우는 담배의 맛과 이 장소의 이름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ㅋㅋㅋ담벼락’이 생겨난 데는 아마 길 건너 금호아시아나 직원들의 영향도 클 것 같습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입사할 때도 금역 서약을 해야하고, 흡연자는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받는 등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회사죠. 그래도 흡연의 중독성을 넘어서진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외에 서울 장교동 한화빌딩 앞 공터, 쌍림동 CJ제일제당 옆 작은 카페, 여의도 LG트윈타워 지하 1층, 광화문 동화면세점 뒤편 커피체인점 등도 미생들이 즐겨찾는 소문난 흡연구역 입니다.

건물 안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곳도 아직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계동 사옥에는 3개 층에 아직 흡연실이 마련돼 있습니다. 건물 앞 야외 주차장 일부에도 흡연 구역을 설치해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죠. 담배회사인 KT&G는 서울 대치동 본사의 5개층에 층마다 흡연실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너구리굴을 여러 군데 돌아다녀보니 들리는 소리는 비슷합니다. “담뱃값 오른 것도 서러운데 쫓겨다니는 신세라니, 이참에 확 끊을까.” destinybr@hankyung.com(끝)

오늘의 신문 - 2024.09.28(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