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시간은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개성 강한 캐릭터 안에서 ‘센’ 여배우로 기억되던 강혜정은 이제 ‘하루 엄마’라는 수식어로 더 자주 호출된다. 영화 안에서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던 그녀를 떠올렸을 때 일견 아쉬울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강혜정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통해 5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강혜정은 이 작품을 자신의 새로운 출발이라 말한다. 철없고 푼수기 가득한 억척 엄마 ‘정현’을 신나게 연기해내는 강혜정을 보고 있자면, 그녀가 비로소 돌아왔구나 싶어진다.
Q. 결혼과 출산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하 ‘개훔방’)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까.
강혜정: 전혀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거다. ‘하루 엄마’로서 극 중 두 아이를 둔 정현에게 이입하기 쉬웠다. 하지만 그것이 작품 선택의 주요 요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시나리오가 지니고 있는 진심에 끌렸다. 좁은 봉고차 안에서 사는 정현과 그의 가족들의 상황은 너무나 처절하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들이 전혀 질퍽하지 않게, 캐주얼하게 그려졌다. 심리묘사가 가볍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무조건 동정하지 않게끔 만들어 낸 것들이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나와서 좋았다.
Q. 아이들 뿐 아니라 강아지도 등장한다. 배우 최민수도. 김성호 감독이 제작보고회에서 충무로의 3대 어려움으로 ‘최민수+아이+동물’이 있다고 유쾌하게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는데.(웃음)
강혜정: 하하하. 그런데 감독님이 민수 선배님에게 도움을 엄청 많이 받으셨을 거다. 민수 선배가 아이들 케어를 너무 잘 해 주셨다. 특히 아이들이 연기를 뻔하지 않게, 연습해 온 것만 하지 않게끔 만들어주신 장본인이다. 또 굉장히 익살스러우시다. 자유로운 느낌이 있어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Q. ‘개훔방’은 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끌렸을 것 같다.
강혜정: 사실 하루가 극장을 딱 한 번밖에 가보지 못했다. ‘겨울왕국’때였는데 그것도 손님이 거의 끊길 때쯤 가서 봤다. 그러다보니 극장 에티켓을 알 턱이 있나. ‘개훔방’ VIP 시사회에 왔는데, 집에서 IPTV 틀어놓고 영화 보듯이 계속 이야기하며 보더라. 신기한 것은 내가 안 나오는 장면에서는 굉장히 몰입해서 보는데, 나만 나오면 흐트러졌다. 결국 하루를 데리고 극장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Q. 영화 속에서 엄마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싫었을까.
강혜정: 없지 않았을 거다. 그걸 아주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는 아닌 거지. 그리고 영화를 찍는 동안 하루와 많은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자기가 없는 시간 동안 저기(영화 현장)에서 저러고 있었구나를 눈으로 확인한 거라, 하루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Q. 출연진이 화려하다. 당신 뿐 아니라, 김혜자 최민수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을 아이들이 주인공인 전체관람가 영화에서 한 번에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일견 놀랍기도 하다.
강혜정: 사실 김혜자 선생님이 노부인을 연기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큰 영화도 아니고 비중이 많은 캐릭터도 아니니까. 그런데 또 내가 캐스팅되기 직전에 최민수 선배님이 캐스팅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된 거지?’ 싶긴 했다.(웃음) 알고 보니 그 세팅을 김혜자 선생님이 하셨더라.
Q. 김혜자 선생님의 경우 ‘마더’ 이후 5년 만의 스크린 복귀다.
강혜정: 선생님이 정서적으로 뭔가 치유 받는 영화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워낙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시기도 하고.
Q.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센 영화에서 강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은 ‘힐링’이 되는 차기작을 찾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당신도 강한 역할을 많이 연기했는데, 그런 경험이 있나.
강혜정: 그래서 찍은 게, ‘허브’(2007년)다. 전혀 영향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연기에 몰입하다보면 어느 순간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성질에 취하게 되는 순간이 오거든. 데낄라 마시고 취하는 것과, 소주 마시고 취하는 것과, 맥주 마시고 취했을 때의 느낌은 모두 다르다. 어떤 술은 조금 곱게 취하고, 어떤 술은 지독하게 취한다. 그렇듯이 곱게 취해서 끊어지는 작품들은 여운이 남아도 일상에 큰 지장은 없다. 그런데 질퍽하게 취하는 작품들은 연기가 끝나도 힘들다. 그럴 땐 스스로에게 치유의 시간을 주고 싶어진다. 배우들이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싶다.
Q.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하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아이들이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더라. 그런 아역들을 보는 선배의 마음은 어떤가.
강혜정: 너무 좋다. 이레, 은택이, 지원이처럼 연기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건 앞으로 우리가 겪을 문화생활에 있어 굉장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만의 매력과 스크린 장악력을 지닌 친구들이다.(웃음) 자신만의 에너지를 가진 친구들이 성장하면서 우리 영화계에 줄 자극을 생각하면 기대가 크다. 다만 이 아이들이 커 나가는 과정에서 온전히 본인들만을 위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평범한 시간들이 보장됐으면 좋겠다.
Q. 많이 받아 본 질문이겠…
강혜정: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안 시킬 거다! 하루에게 연기 시킬 생각은 없다.
Q. 하하하. 그 질문은 아니었는데 이왕 나온 김에 물어보자. 하루 본인이 연기를 원해도 안 시킬 텐가.
강혜정: 안 시킬 거다. 하겠다고 하면 머리카락을 다 잘라버릴 거야.(웃음) 왜냐! 배우는 너무 외로운 직업이니까. 배우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한정돼 있다. 음악과는 다르다. 우리 신랑(타블로)이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음악은 위에서 ‘컨펌’만 해주면 얼마든지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서 선보일 수 있다. 그런데 배우는 불가능하다. 벤 애플렉이나 (하)정우 오빠 같은 특이한 케이스, 그러니까 글 쓰는 능력이 있어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하는 일부 특징적인 배우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타인이 쓴 걸 골라서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Q. 데뷔 초반에 독특한 캐릭터를 굉장히 많이 연기했다. 많은 주목을 받으며 쉬지 않고 연기 했는데, 그런 바쁜 생활 속에서도 외롭던가. 정신이 없었을 것도 같은데.
강혜정: 바쁜 것과 외로운 것은, 다른 것 같다. 그게 상당히 여러 관점인데, 내가 이 직업 특징상 외롭다고 하는 것은 카메라 앞에 섰을 때다. 카메라 앞에서는 혼자서 온전히 캐릭터와 싸워야 한다. 그것이 고통스럽게 올 때도 있고, 고독하게 올 때도 있다. 좋지만은 않은 상황인 거다.
Q. 그런데 그건 뮤지션도 마찬가지 아닌가. 뮤지션 역시 음악을 내놓기까지 온전히 혼자서 창작의 고통과 싸워야 할 텐데, 그것 역시 외로움이지 않을까.
강혜정: 그래도 음악은 본인이 원하는 걸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있지 않나. 그에 반해 배우는 나와 있는 시나리오 중에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서 도전하는 거다. 온전히 자신이 탄생시킨 작품은 아닌 셈이다. 그랬을 때 창작자의 의도를 알아 가는 단계까지 또 엄청난 고민이 따른다.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까지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의심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재게 된다. 감정 씬을 찍을 때는 마치 대역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물론 막상 슛이 들어가면 100% 믿고 가려고 한다. 안 그러면 관객이 안 믿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너무나 외롭다. 자신을 괴롭히는 직업이라서.
Q. 지금 ‘리타 길들이기’ 무대에 서고 있는데, 연극은 또 다를 것 같다. 연극 역시 고통은 따르겠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닌 관객과 호흡을 하는 거니까.
강혜정: 맞다. 많이 다르다. 카메라는 호응을 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연극은 내가 얼마만큼 하고,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 관객들의 반응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혼자 있는 느낌이 아니다.
Q. 그에 반해 연극은 모니터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지, 아쉬운 건 없는지, 바로 바로 캐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강혜정: 참 다행인 게, 나는 모니터를 안 좋아한다. 왜? 아쉬운 게 항상 보이니까. 아쉬운 게 보이면 그걸 고치고자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면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순간에 보여 지는 것에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모니터를 안 좋아한다. 나는 내 얼굴 보는 걸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하루가 신랑 닮은 것도 참 고맙다.(웃음) 물론 연극을 할 때 ‘무대 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은 인다. 무대 위에 있는 것과, 객석에서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다르니까. 지금은 그 아쉬움을 더블 캐스팅인 (공)효진 언니를 통해서 달래는 중이다.
Q. 공효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녀가 하정우와 연기한 영화 ‘러브픽션’(2011)은 원래 당신이 하기로 했던 작품이다. ‘강혜정이 했다면, 어떤 ‘러브 픽션’이 됐을까’ 궁금해 하곤 했다.
강혜정: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러브픽션’은 출연하기로 미팅까지 다 한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이하루 양의 잉태로 못하게 된 영화다.(일동 웃음) 지금 ‘개훔방’과 같은 제작사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표님께 정말 죄송하다.(웃음) 그런데 내가 했다면, 아마 효진 언니만큼 못했을 거다. 효진 언니니까 그렇게 매력적으로 캐릭터가 표현된 거다.
Q 그런 공효진과 한 작품에 더블캐스트로 출연 중이니, 인연이 깊구나 싶다.
강혜정: 그런데 언니와는 작품적으로 겹치는 이미지가 아니다. 어릴 때는 오히려 (임)수정 언니와 비교가 많이 됐었다. 비슷한 시기에 알려졌고, 작품적으로도 겹쳤다. ‘연애의 목적’도 수정 언니에게 먼저 들어갔다가 나에게 온 케이스고. 효진 언니는 다른 라이벌들이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한 작품에서 만나서 너무 좋다.
Q. 언론에서 라이벌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나.
강혜정: 나는 이제 라이벌이 없다. 전혀! 완전 ‘독고다이’다. 왜? 나만 결혼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나는 이제 경쟁력이 없다.
Q. 그 말엔 동의하지 못하겠다. 배우로서의 본인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강혜정: 매력? 모르겠다. 많은 분들이 털털하다고 해주긴 하는데, 그 말의 구체적인 뜻도 잘 모르겠고. 나쁜 뜻이 아닌 것 같긴 한데.
Q. 그런 건 있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당신이 지니고 있었던 느낌과 지금의 느낌엔 많은 차이가 있다. 강렬했던 초반의 강혜정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다.
강혜정: 나에게 팬들이 아직도 있나?
Q. 배우로서 본인을 저평가 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강혜정: 그런 표현을 적극적으로 해 주시는 분들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웃음)
Q. 만약 강혜정이 객석에 앉아서 강혜정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나.
강혜정: 어떻게 보여 지면 좋겠다는 큰 욕심은 없다. 그런데 20대 때 친한 친구가 두 명의 스페인 여배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한 명은 오드리 햅번처럼 미적으로 너무 아름다운 배우이고, 또 한 여배우는 연기적으로만 기억되는 배우다. 그런데 이 두 여배우들이 나이가 들어서 공교롭게도 어떤 영화제 후보로 동시에 올랐다. 그때 사람들이 손을 들어준 건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다. 한동안 사람들은 이 배우의 이름도 잘 몰랐다. 그냥 캐릭터로 불렀다. “있잖아, 그 셀레나 역할의 배우” 그런 식으로. 나는 그게 너무 멋있게 보였다.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20대 초반부터 했다. 무대 위나 스크린 안에서까지 내가 부각 되는 건 별로다. 리타나 정현이 아닌, 강혜정으로 보인다면 스스로가 구속 받는 느낌이 들것 같다. 내가 나로 사는 건 타블로나 이하루,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면 충분하다.
Q. 그런 의미에서 말하면, ‘올드보이’ 때 “그, 미도(강혜정) 있잖아!” 라고 많이 불렸다.
강혜정: 아, 그랬었다. 드라마 ‘은실이’ 때도 “은실이 괴롭히던 못된 년!”이라고 불렸고.(웃음) 난 그런 식으로 불리는 게 너무 좋다. 내 이름은 오로지 나만 갖고 싶다.
Q. 당신 안에는 여러 명의 강혜정이 있는 것 같다. ‘올드보이’, ‘웰컴 투 동막골’, ‘연애의 목적’ 등에서 같은 얼굴로 전혀 다른 느낌의 모습을 보여줬다. 당신의 다음 스텝(step)이 궁금한 이유이기도 하다.
강혜정: 뭔가가 있겠지. 여자 ‘테이큰’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한다. 소위 나의 가장 번영기일 때의 작품, 침체기 때의 작품, 그리고 현재 다시 시작하는 이 상황에서의 작품. 이 모든 것들이 생뚱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중간에 내가 실수한 것도 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쌓여서 새롭게 시작될 거라 믿는다. 나의 30대가.
Q. 그 과정에서 ‘개훔방’은 어떤 의미인가.
강혜정: 스타트지! 아마 아무도 기대 못 하셨을 거다. 정현처럼 철면피 푼수 같은 아줌마를 내가 연기할 줄은. ‘리타 길들이기’의 리타도 마찬가지고. 원래의 나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애를 낳아서 그럴까.(웃음)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처녀 때와 비교하면 부끄러움에 대한 기준이 특히나 많이 달라졌다.
Q. 지금은 어떤 것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나.
강혜정: 많다. 가장 크게는 내 가족에게 부끄러운 거. 옛날부터 그랬는데 나는 기질적으로 내 패밀리, 내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성향이 강하다. 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뭘 해도 행복할 것 같다.
Q. 지금 인정받고 있지 않나.
강혜정: 다행히도. 얼마 전에 신랑이 ‘리타 길들이기’를 보러 왔다. 사실 인정받고 싶었다. ‘내가 애 키우면서 이렇게 고생했어!’라고.(웃음) 일단 우리 신랑이 연극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 연극 중반까지 무대 위의 저 여자가 자기 와이프인 줄 몰랐다고 하는 말에 굉장히 행복했다.
Q. 최고의 찬사다.
강혜정: 그러니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훅’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는 게, 나에겐 굉장히 중요하다. (끝)
사진. 구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