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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첩첩산중 리스크에 둘러싸인 증권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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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우 증권부 기자) “서로 안갈려고 해요. 부담이 워낙 커서...”

국내 중견 증권사의 지점장, 그것도 노른자위로 꼽히는 서울 강남 지역 지점장으로 승진 발령받은 한 인사는 신년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손사래부터 친 걸 보면 스트레스가 큰 눈치였습니다. 그는 “요즘 임원 승진도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한다”고 전했습니다. 승진 대상에 오르면 오히려 ‘위로주(酒)’를 동료들이 사준다는 게 이 인사의 전언입니다.

증권사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럴만 하다 싶었습니다. 정통 증권업으로 불리는 브로커리지 영업, 그러니까 투자자들의 주식 매매를 돕는 위탁매매는 2000년도 후반께에 비해 거의 반토막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태입니다. 2011년 4조3000억원에 이르던 위탁매매 수수료가 2013년 2조6000억원으로 줄었다는 게 금융감독원의 집계이고, 이 수치는 작년에 2조원대 근처까지는 내려갔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습니다.

브로커리지 비중이 절대적인 지점 입장에선 본사가 정해 준 지점별 목표실적을 채우기가 녹록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2차 구조조정이 불어닥칠 경우 살생부를 작성해야 하는 ‘악역’을 맡을 수 있다는 부담도 있습니다. ‘승진 탈락이 축복’이라는 증권맨들의 우스개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위기의 증권업’은 신용평가사들의 리포트에도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지난 8일 올해 증권업 전망에 대해 “안전자산 선호 기류가 심화되면서 주식시장이 활력을 찾기 힘들 것” 이라며 산업위험도를 ‘BBB’로 평가했습니다. 회사채 등급으로 따지면 ‘정크본드(junk bond)’를 겨우 모면한 수준입니다. 정크본드 등급은 BBB보다 두 단계 낮은 BB+이하를 말합니다.

증권사들은 너도나도 돈되는 사업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립니다. 가장 큰 트렌드가 IB(투자은행)사업 강화입니다. 특히 경쟁이 치열해진 게 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 담보대출 확약이나 조건부 CP인수약정 같은 신용업무인데, 수익 면에서는 주식영업, 채권발행, IPO같은 다른 IB서비스 보다 높고 처리 절차도 비교적 간단하다는 게 이 업무의 특성이자 장점이죠. 한 증권사 관계자는 “한해 수익을 정산해보니 지점영업 직원의 3분의 1도 안되는 IB부문 직원이 위탁매매의 두 배를 넘는 수익을 냈다”고 귀뜸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IB사업 상당부분이 브로커리지와는 달리 리스크가 꽤 높은 사업이라는 점입니다. 우선 우발채무가 급증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수익을 잘 내기로 유명한 국내 한 증권사는 자기자본의 4배에 달하는 우발채무를 떠안고 있었습니다.

증권사들이 요즘 어느때 보다 리스크 관리에 공을 들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상당수가 IB업무는 물론 수익사업 전반의 리스크를 미리 체크하기 위해 사전 사후 심사조직을 별도로 신설,운용하고 있습니다. 9명에 이르는 심의위원회를 운용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리스크를 걸러내려는 심사팀과 수익을 내려는 영업팀과의 내부 갈등도 심심찮게 불거진다는 게 증권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입니다. 한 IB부문장은 “투자심사팀이 클레임을 걸어 내부 커뮤니케이션에 상당한 진통을 빚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그리 긍정적이진 않는 것 같습니다.한 신용평가사 관계자의 말입니다. “오너 아닌 전문경영자가 과연 단기 수익 확대 유혹을 견딜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결국 리스크까지 해소하면서 수익을 내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일각에서 “리스크가 한꺼번에 터질 수 있다는 게 최대 리스크”라는 경고가 나오는 걸 보면, 최악의 빙하기를 앞둔 공룡‘이라고 스스로를 빗대는 증권맨들의 자조(自嘲)가 웬지 과장된 자기비하만은 아닌 것 같은 요즘입니다.(끝)

오늘의 신문 - 2024.05.0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