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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와 짐바브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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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모 워싱턴 특파원)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였습니다. 중남미에서 스페인으로부터 가장 늦게 독립했습니다. 멕시코(1821년) 아르헨티나(1816년) 등이 1880년대 초반에 독립했지만 쿠바는 스페인의 강력한 저항에 스스로 독립하는데 실패하고 결국 1898년 미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했습니다.

스페인이 자존심을 지키면서 최후까지 쿠바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아바나에 반듯하게 놓여져 있는 도로와 야자수 나무를 보니 두 차례 취재를 다녀온 적이 있는 아프리카의 독재국가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가 떠올랐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기후와 자연환경이 좋기로 유명한 짐바브웨는 1980년에야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 끝까지 내놓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짐바브웨는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몇 안되는 ‘말라리아 프리(free)’ 국가입니다. 그 만큼 사람이 살기 좋다는 뜻이죠. 짐바브웨 무타레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겨울 휴가를 보낼 정도로 고급 휴양지였습니다.

무가베 대통령은 독립 후 백인 농장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지금까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친미(親美)정권에 대항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후 미국인들의 재산을 몰수해 미국의 엠바고를 불러온 것과 흡사합니다.

칠레와 페루 등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서정혁 아바나 관장은 쿠바가 중남미 가운데 최고 관광지라고 단언했습니다. 서 관장은 그 이유로 첫째 태양과 해변, 둘째 헤밍웨이· 체 게바라·사회주의 테마, 세째 시가·살사댄스(쿠바의 전통민속춤)·럼주·음악 등 문화를 꼽았습니다. 자연경관과 역사, 그리고 문화가 잘 어우러져 있는 몇 안되는 관광지라는 것입니다.

쿠바는 반세기 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지속되면서 냉전의 마지막 ‘유산’으로 불리지만 아바나 거리에서는 사회주의 잔재를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총을 차고 다니는 군인들은 없었고, 제복을 입은 경찰들은 가끔 눈에 띌 뿐이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평온하고 아늑한 도시였습니다.

1년에 절반 가량은 아바나에서 일을 한다는 프랑스인 마르조 오키토씨는 “쿠바는 마약 갱단도 없고 총과 폭력이 없다. 중남미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다. 나는 이런 아바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칭찬했습니다. 밤 11시경에 호텔 로비로 잠시 내려와 봤습니다. 로비에는 아직도 관광객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호텔 밖으로 나와 저 멀리 해변도로를 내다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희미한 가로등 불 아래에서 걷고 있었습니다. 진짜로 안전한 것 같았습니다.

프랑스인 오키토씨에게 물었습니다. “사업은 잘 되고 있느냐?”고. 그는 “좋지 않다. 그러나 미국과 수교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의 기대는 쿠바인들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지난해말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양국간 국교정상화 추진을 선언한 이후 아바나 거리에서 반미시위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포니처럼 생긴 고물 택시를 세워 놓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던 롤란드씨는 “쿠바 경제가 너무 힘들다. 그러나 미국과 수교하면 좋아질 것”라면서 한손으로 ‘택시! 택시!’를 계속 외쳤습니다.

아바나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현지 가이드에게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가 어떻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쿠바 사람들은 대체로 큰 욕심이 없다. 탐욕스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진짜로 욕심이 없느냐고 되묻자 그는 “비싼 위스키를 사 먹지 못하면 싼 럼주로 마시면 된다. 이런 게 쿠바인들의 정서”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기자인 저에게 솔직한 심정을 다 털어놓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는 곳곳에 부정부패가 만연하다는게 현지 외국인들의 전언이었습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6.29(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