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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를 '너구리 굴'로 만들었던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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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 읽기) ‘철혈재상’으로 불리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지독한 애연가였다. 청년 시절부터 프로이센 장교단과 부대원들은 거리에서 흡연할 수 없다는 흡연금지령을 노골적으로 수차례 위반하다 적발되곤 했다.

담배는 비스마르크의 외교 무기이기도 했다. 비스마르크가 유럽 외교무대에 데뷔하던 당시 독일의 크고 작은 17개 나라로 구성된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가 주요 ‘전장’이었다. 연방회의 내 국방회의 석상에선 의장국인 오스트리아의 툰-호엔슈타인 백작만 흡연이 관례적으로 허락됐다. 이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의 담배 유통 독점권을 획득하면서 만들어진 ‘전통’이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대표로 참석한 비스마르크는 이 같은 관례를 무시하고 거리낌 없이 여송연을 피웠다. 그것도 비스마르크가 지독히도 싫어했던 급진세력 학생에게서 빌린 담배였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지독한 애연가이자 프로이센을 “로또 복권에 당첨된 졸부”로 폄하했던 툰-호엔슈타인 백작에게 다가가 담배를 꺼내 물고는 직접 불을 빌려달라고 청하기까지 했다.

국방회의 석상에서 전통 아닌 전통을 깨버린 비스마르크의 행동은 ‘위신투쟁’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프로이센 대표가 담배를 피워대자 다른 국가 대표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지침을 구하기 위해 본국에 이 일을 보고할 지경이었다. 결국 이 문제를 둘러싸고 독일 연방 각국은 반년 가까이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두 나라만 담배를 피우는 상황이 초래됐다. 결국 바이에른 대사 칼 폰 슈베크가 담배를 꺼내 물었고, 하노버 대사도 흡연대열에 동참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면서 비흡연자들까지 자국의 위신문제 차원에서 담배를 피워야할 처지가 돼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는 ‘흡연의회’가 돼버렸다.

담배는 비스마르크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정치인·군인과의 벽을 허무는 도구이기도 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 보오전쟁의 향방을 가를 쾨니히스그레츠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비스마르크가 작전 진행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같은 애연가였지만 비스마르크와 관계가 껄끄러웠던 몰트케 장군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설명을 청하기도 했다.

비스마르크와 얽힌 가장 유명한 담배 일화의 배경도 바로 쾨니히스그레츠 전투다. 쾨니히스그레츠 전투가 끝나갈 무렵 비스마르크의 주머니엔 승전 후에 아껴 피울 담배 한 개비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침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를 발견하고선 그의 마지막 길에 잠시나마 휴식을 줄 길동무가 되도록 ‘돛대’담배를 건넸다. 비스마르크는 이후 이 담배를 “직접 피우진 못했지만 그 담배만큼 맛있는 담배는 없었다”고 말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새해 부터 담뱃값이 대폭 인상된다. 흡연자 구경은 점점 더 힘들어질 듯 하다. 10여년 전만 해도 각종 공공시설, 작업환경이 ‘너구리 굴’인 경우를 보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이제는 머나먼 옛날 얘기가 돼버렸다. 10여년 뒤 젊은 세대들은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너구리 굴’로 만들었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어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몇자 끄적여봤다.(김동욱 증권부 기자)

***참고한 책***

A.J.P.Taylor, Bismarck-The man and the statesman, Vintage 1967

강미현, 또 다른 비스마르크를 만나다-철혈재상 또는 영원한 애처가, 에코리브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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