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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말, 대한항공 전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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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 읽기) 미인(美人)의 상징으로 불리는 고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BC 69∼BC 30)의 목소리가 어땠을지는 추측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언어를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썼을까는 비교적 분명하다.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어, 라틴어 등 9개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각국의 외교사절들과 직접 ‘소통’을 자유롭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등 로마인들과 만나 ‘사랑을 나눴을 때’는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로 직접 대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가장 편하게 구사했고, 그녀의 ‘제 1언어’였던 것은 고대 이집트어가 아닌 그리스어(마케도니아 방언)였다.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기록들은 매우 단편적으로 남아 있고, 정치적 승자들이 그녀에 대한 각종 기록을 왜곡했지만 클레오파트라가 태생적으로 이집트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세계제국 중 이집트 지역을 물려받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수세기에 걸쳐 출신지 언어인 그리스어(마케도니아 방언)를 사용했고, 이집트에서 그리스어를 쓴다는 것은 특권계층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태어난 이후 접한 모국어가 그리스어였고, 그녀는 그리스 문학과 그리스 문화를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평상시에는 당연히 그리스식 머리띠와 그리스 복장을 입고 지냈다.

하지만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왕들 중에서 이집트어를 구사한 첫 왕이기도 했다. 진정한 이집트의 지배자를 표방하기 위해 때론 ‘새로운 이시스 여신’으로 자신을 선전했고, 이집트 파라오 스타일의 의복을 입고 지배권을 만인에게 표방하기도 했다.

이는 이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지배층과 클레오파트라가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지배 기간 동안 그리스인들은 인종적으로는 줄곧 소수파에 머물렀지만 이집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물론 이집트인과 그리스인들이 100% 서로 고립돼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겠지만 일부 파피루스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볼 때 이집트어가 당시 지배층의 그리스어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 그리스인과 이집트인은 적용되는 법률도 달랐다. 행정업무에 종사하던 이집트인들은 그리스어를 잘 읽고 쓸 줄 알았고, 일부는 그리스식 이름과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지배층인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어를 배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남성 중심적인 고대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독립적이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여성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다른 문화 수용에서 대단히 개방적이었고 과감했다. 어쩌면 이 같은 클레오파트라의 특성이 파란만장한 삶을 불러왔고, 또 그녀를 “위대한 왕국의 강력한 통치자이자 신적인 존재이면서, 위대한 영웅들의 연인이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화려한 인물”로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존재로 만든 배경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져 가던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태가 조현아 전 대항항공 부사장의 동생인 조현민 전무의 ‘사과문’으로 다시 기름 부은 듯한 모습이다.

조 전무가 사과문에서 “(이번 사태는)한 사람이 아닌 모든 임직원의 잘못” 이라고 표현하면서 대한항공 직원과 시민들의 심기를 거스른 것인데. 커뮤니케이션 담당 임원의 발언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소통’과 거리가 먼 모습이어서 마음이 답답하다. 한편으론 반성문의 전체적인 글이 매우 어색한 것을 보고 조 전무의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 전무는 ‘임직원’이란 단어의 뜻을 정확히 몰랐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를 물려받은 것은 ‘왕가의 핏줄’이란 최고의 ‘낙하산’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비록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그의 부단한 노력과 스스로 피지배층의 언어인 이집트어를 배울 정도로 과감한 소통행위 때문이었다. 모든 위대함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에서 나온다. 대한항공 사태를 보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김동욱 증권부 기자)


***참고한 책***

Adrian Goldsworthy, 『Antony and Cleopatra』, Phoenix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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