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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관료화...'착한 판사'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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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준 지식사회부 기자) 착한 판사가 늘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법관이 아니라 대법원에 길들여진 판사가 늘어나고 있다.

법관 사회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상하 간, 동료 간 소통이 막혔다. 판사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는 정책이나 판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제시한 지침이나 방향을 충실히 따를 뿐이다. 법관 조직이 과도하게 관료화 계급화로 치닫고 있다.

법원 내부 게시판인 코트넷에는 판사가 쓴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 2012년 서기호 서울북부지법 판사가 재임용에 탈락하면서다. 서 판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이명박 대통령을 풍자하는 표현 등을 올렸다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헌법은 법관의 임기를 10년으로 정하고 있다. 대법원 인사위원회는 매년 2월 정기인사를 앞두고 재임용한 지 10년이 된 판사들을 대상으로 자질평가와 근무성적 등을 기준으로 재임용 여부를 심사한다. 당시 대법원은 서 판사가 ‘근무평정이 하위 2%에 해당한다’며 재임용 부적격 통보를 했다. 그는 서울중앙지법 판사로 재직하던 2009년에는 촛불시위 재판에 개입한 의혹이 있는 신영철 대법관에 대한 비판을 주도했다.

법원 내부에서 재판 개입에 대해 거부하고 시정조치를 요구했던 서 판사는 법원에서 쫓겨났다. 반면 신영철 대법관은 대법관으로 법원에서 임기를 마치고 있다.

판사들은 말한다. 현재 법원에서 한 명의 판사는 거대한 조직의 부속품과 같다고. 서울 소재 법원의 한 판사는 “판사가 지녀야 할 자긍심이나 명예를 느끼지 못한다”며 “말이나 행동을 조금만 눈 밖에 벗어나면 지방근무로 나가거나 근무 평정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한 고위 법관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며 튀는 판결이나 언행으로 사법부 신뢰가 손상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1심 판결을 공개 비판한 김동진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에게 대법원이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결정했다. 김 부장판사는 지난 9월 법원 내부게시판인 코트넷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글을 올리고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를 비판했다. 그는 ‘대선 기간 중 정치에는 관여했지만 선거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서울중앙지법 판결을 궤변이라 말했다.

대법원은 문제의 글이 올라온 오전에 김 부장판사의 게시 글을 직권으로 삭제했다. 물론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입신영달을 위해 사심을 담아 쓴 판결”이라는 등 일부 명예를 훼손하는 표현이 있긴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조치는 법원 판사들을 침묵으로 들어가게 했다. ‘코트넷에 글 올림→글 삭제→징계’의 고리를 보며 다음 단계는 ‘재임용 탈락’을 떠올리는 판사들에게, 이는 어떤 신호를 주는 것일까.

변호사 업계의 어려움도 ‘착한 판사’를 늘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서울 소재 법원은 한 판사는 “예전에는 판사로서 주체적으로 발언하고 판결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나가도 변호사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며 “변호사 업계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법복을 벗을 생각을 못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군사정권 때 일어났던 사법파동 같은 것을 생각해보라”며 “당시 100% 재임용 탈락을 하겠지만 변호사로 일해도 충분하니까 수백 명의 판사가 연판장 돌리는 것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한 부장판사는 “판사도 이제 회사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가 됐다”며 “이러한 구조 속에서 소신껏 무엇을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변호사 숫자가 늘어나면서 대체 가능한 판사 후보군이 늘어난 점도 한 이유다. 말을 잘 듣는 법조인이 많아졌고 이들 대부분이 법관을 희망하는 점이 ‘착한 판사’ 집단을 공고하게 하고 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의 단계를 거쳐 법조인이 된 변호사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한 잘못된 점을 드러내거나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러한 현상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 경북대 로스쿨에서 교수로 있는 신평 전 판사는 1993년 한 언론에 그가 속한 법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법관 조직의 과도한 관료화, 계급화는 사법부 만악의 근본’이란 글이었다. 이 글을 쓰고 신 판사는 그해 8월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당시 그는 『법관은 근본적으로 소신을 가지고 양심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하는 것이 법에 의해 주어진 의무요, 책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사법부에서는 획일적・수직적인 상명하달식의 사고방식이 횡행하는 관료화・계급화의 오래된 병폐가, 떳떳하고 양심 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상급자의 눈치를 살피는 모나지 않는 처신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법관을 몰아왔다. 고상한 정열과 순수한 이상은 매몰되어 버리고, 그 자리는 자조와 불만, 반문화적 작태가 차지했다. 이러한 지배적 분위기는 많은 전도양양한 젊은 법관들에게서 용기와 창조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혼까지 앗아가 버렸다.』라고 말했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신평 전 판사의 글은 유효하다. 한 명의 판사는 곧 하나의 법원이다. 관료화된 집단의 부속품으로 판사는 존재해서는 안된다. 한국 사회 다수의 견해와 입장, 성공한 사람을 위한 법 논리 등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의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한 명의 판사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한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17(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