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80년 전 대공황을 키운 건 글로벌 리더십 실종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김동욱의 역사 읽기)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축으로 한 OPEC의 공격적인 저유가 정책에 러시아를 비롯한 신흥국 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러시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 산유국 내지 원자재 대국들이 급격한 유가하락에 따른 경제성 악화로 휘청이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저유가발 글로벌 경제위기 가능성마저 점친다고 하는데. 그 내막을 보면 저유가 정책이 서방의 러시아 견제라는 시각도 있지만 중동 산유국과 미국 세일가스 업체 간 ‘치킨게임’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 듯 하다. 그 이면에는 글로벌 석유정책에 대한 미국 패권과 중동에 대한 리더십이 예전 같을 수 없다는 점도 한몫 한다.

개인적으론 글로벌 리더십 부재가 꼬리를 물고 악재로 이어졌던 1930년대의 대공황이 연상된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 학자들의 설명이 엇갈린다. 경기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장기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실물요인에 원인이 있는지 아니면 화폐 요인에 이유가 있는지를 놓고 대립했다. 기원이 미국에 있는지 유럽에 있는지를 놓고도 논박을 거듭했다. 1920년대 기술발전에 따른 대량생산 체제 도입과 대규모 실업 간 상관관계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글로벌 경제가 동시에 대혼돈에 빠지게 된 치명적인 약점이 국제자본주의 시스템 본질에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운영상 실수였는지를 놓고도 의견이 갈렸다. 또 1929년의 불황이 미국 금융정책의 귀결이었는지, 아니면 일련의 역사적 우연의 연속이었는지를 놓고 밀튼 프리드먼, 폴 새뮤얼슨 등 거장 경제학자들이 저마다의 설명을 내놨다.

대공황의 원인을 짚은 경제학자들의 면면만 봐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급 거장들의 집합소라 할 만하다. 미국 금융정책 원인설(밀튼 프리드먼), 금본위제 오용설(라이어넬 로빈스), 디플레이션 실책설(존 메이너드 케인스), 장기 정체설(앨빈 한센), 구조적 불균형설(잉그바르 스베닐손) 등 한 가닥 한다는 경제학자들은 한 마디씩 경제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내놓았다.

여기에 갤브레이스 같은 학자는 이자율이나 신용공급 같은 순수 경제학적 요인 외에 ‘분위기(the mood)’가 1930년대 비참함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고 보기도 했다. 독일의 발터 오이켄은 1920~1930년대의 완전고용정책 실험과 중앙관리적 경기조종 정책이 더 큰 재난을 가지고 왔다고 봤다. 조그만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 벨제붑(바알세불)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찰스 P.킨들버거 고 MIT 교수의 주장이다. 킨들버거 교수는 경제대공황 발생 당시, 글로벌 지도력 부재를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1929년 불황이 그처럼 광범위하고 심각하며, 장기적인 까닭으로 국제경제 시스템이 불안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불안정의 배경에는 글로벌 정치 리더십의 상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제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책무와 관련해 영국은 능력을 상실했고, 미국은 그 같은 책무를 맡을 의사가 없었다는 지적이다.

실제 1929년 대공황 이전에 발생한 여러 경기불황의 충격은 큰 타격 없이 흡수됐다. 1920년 주식시장 붕괴나 1927년 경기후퇴의 충격은 그럭저럭 넘어갔다. 1927년 미국의 금리인하 충격이나, 1928년 독일에 대한 대부정지 충격 등이 1929년 주식시장 붕괴에 비해 결코 약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이처럼 1929년 이전의 충격이 어느 정도 수습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글로벌 최강국이던 영국이 불안한 세계경제 시스템을 지도력을 발휘해 어느 정도 안정시켜 줬기 때문이라는 게 킨들버거 교수의 판단이다.

하지만 1929년이 되면 쇠퇴한 영국은 세계경제를 안정시킬 능력을 상실했고, 아직 글로벌 리더로 자신감을 갖추지 못한 데다 경험도 일천한 미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대선을 앞둔 미국의 어수선한 정치 일정도 글로벌 리더십 부재에 한몫 했다. 금본위제 복귀 및 국제공조 강화를 골자로 하는 국제연맹 제안을 다루기 위한 세계경제회의가 당초 1932년 열릴 예정이었지만, 미국 대선일정과 후버 및 루스벨트 두 대선후보의 미온적 태도로 1933년으로 연기됐다.

그나마 1933년 6월 열린 회의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밝힌 미국의 첫 공식 입장은 “미국 정부의 정책우선권은 국내경제 번영을 되돌리는 것이며 국제문제는 간섭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에 각국은 공조는커녕 저마다 따로 노는 모습을 보였다. 근본적으로 ‘세계경제의 엔진’ 미국의 생산력이 떨어진 시점(1929년 3월 62만6000대에 이르렀던 미국의 자동차 생산은 같은 해 9월이 되면 41만6000대로 감소한다)에 선진국들은 과도한 긴축정책을 고수했다.

1920년대 미국은 증권투기 억제 등을 목표로 긴축정책을 고수했고, 프랑스는 법적·정치적 요인 때문에 긴축을 단행했다. 미국, 프랑스 같은 흑자국이 긴축을 하면서 독일, 아르헨티나, 브라질, 호주, 캐나다, 폴란드 등 적자국은 경제활동이 위축되는 타격을 입었다. 이들 국가들이 연쇄 침체에 빠지면서 미국의 수출시장이 약화되고, 여기에 주식시장 붕괴라는 심리적 우려가 더해지면서 공황으로 사태가 커지게 됐다.

이처럼 위기가 심화되면서 모든 나라는 자국의 개별적인 국익만 보호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영국은 1933년 세계경제회의를 기점으로 영연방 내부에 ‘스털링 블록’을 쌓고 파운드화 세계 안에만 안주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프랑스·벨기에·스위스·네덜란드 등은 ‘금 블록’에 안주했다. 또 나치 독일은 독일대로 독자생존을 외치며 유럽은 저마다의 ‘요새’를 구축하며 각자 살길을 찾았다. 동유럽과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조를 포기한 채 위기 탈출구를 찾았다.

그리고 이 같은 움직임이 가속되면서“각국의 개별적 이익도 사라졌다”는 게 킨들버거 교수가 전하는 역사의 교훈이다. 한마디로 그는 글로벌 헤게모니의 부재에서 경제대공황의 원인을 찾은 것이다.

글로벌 리더십이 사라진 시대에 최근의 저유가 패권대결이 1930년대 경제공황과 같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끝)


***참고한 책***

찰스 P.킨들버거,『대공황의 세계』, 박명섭 옮김, 부키 1998

찰스 페인스틴·피터 테민·지아니 토니올로, 『대공황 전후 유럽경제』, 양동휴 外 옮김,동서문화사 2000

양동휴 外,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발터 오이켄, 『경제정책의 원리』, 안병직·황신준 옮김, 민음사 1996

Patricia Clavin, 『The Great Depression in Europe 1929-1939』, Macmillan 2000

Charles P. Kindleberger, ‘An Explanation of the 1929 Depression’ in Harry F. Dahms(Edited), 『Transformations of Capitalism-Economy, Society and the State in Modern Times』, Macmillan 2000

Rondo Cameron, 『A Concise Economic History of the World-From Paleolithic to the Pres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Susan Strange,『Mad Money』,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8

Paul Krugman, ‘Is Capitalism Too Productive?’, Foreign Affairs September/October 1997

오늘의 신문 - 2024.05.0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