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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두고도 쓰지 못했던 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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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증권부 기자) 유가하락의 여파로 전세계 경제가 들썩이고 있다. 기름값이 싸지면 좋을 것 같지만 복잡한 세계경제의 특성상 효과는 복합적이다. 국내 증시에서도 유가하락이 꼭 호재로만 작용하고 있지는 않다.

자연스럽게 글로벌 유가하락을 주도하고 있는 OPEC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에 관심이 보인다. 하지만 석유라는 천혜의 자원을 지닌 중근동 지역 국가들은 역사 상 대부분의 시기동안 눈앞의 자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여러 환경적·기술적 제약 탓에 석유를 제대로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중세 중동지역 경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농업이었다. 하지만 교역에서의 위상은 달랐다. 농산물은 대부분 자가 소비용 이었다. 농산물은 상하기 쉬웠고 부피는 컸으며, 이윤은 적어 장거리 교역에 적합하지 않았다. 교역품목에서 중동지역을 대표한 것은 직물(textile)이었다.

당시 중동산 직물이 유럽에 대량 수출된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주요 직물제품 명칭은 중동지방의 주요 도시명에서 나왔다. 모술에서 모슬린(muslin)이, 다마스쿠스에서 다마스크(damask)가 유래했다. 직물 관련 용어들에도 이슬람 세계의 흔적은 남아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거즈(gauze)는 아랍어 ‘qazz’에서 나왔다. 앙고라산양에서 채취한 모섬유 모헤어(mohair)는 ‘mukhayyar’라는 아랍어 단어에서 출발했다. 치밀한 조직의 평직물을 가리키는 ‘태피터(taffeta)’ 같은 전문용어도 페르시아어 ‘taftah’가 근원이다.

중동지역 정착 농민들은 직물업자들에게 아마와 목면을 제공했고, 유목민은 양모와 가죽 공급원이 됐다. 다만 직물산업의 주요 원료였던 목재만은 언제나 부족해서 비싼 값에 외부에서 수입해야 했다.

직물 생산은 대부분 가내수공업 형태로 생산자 자신의 필요와 지역 내 수요를 맞추는 수준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직물 제조업자들은 태피스트리와 쿠션, 의복, 각종 복식품을 함께 만들었고 그 중 일부는 수출됐다. 이집트 지역에 들어섰던 수많은 왕조들은 설탕제조 노동자와 함께 아마 채취 노동자에게 국가가 일당을 주는 등 적극적으로 직물산업에 개입하기도 했다.

알레포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이슬람권 주요 교역항에선 인디고나 실크 등 주요 직물업 관련 최신 정보를 발 빠르게 다뤘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에도 직물 관련 최적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정보전을 진행했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멕시코산 코치닐 염료를 구입하는 식의 활동을 한 것이다. 알레포에 거점을 둔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영국 레반트코사의 면직물 목도리 제품을 대거 비축했다가 페르시아나 러시아 뿐 아니라 티베트와 카슈미르까지 가서 팔정도로 활동범위가 넓었다.

이슬람권에서 가장 중요한 직물 제품은 ‘티라즈(tirāz)’라고 불린 고급무늬가 들어간 자수옷감 산업이었다. 최고위층용 사치품으로 제작된 티라즈 제작은 국가 독점으로 진행됐다. 티라즈 공방은 국영이었고 자수무늬를 넣은 일꾼들도 국가 소유였다.

실크(비단)는 초기부터 금, 보석, 상아, 진주, 향신료, 태피스트리 등과 함께 부피는 작게 나가면서 부가가치는 큰 귀중품 교역의 핵심 품목이었다. 경제적 의미 뿐 아니라 정치적 무게도 대단했다. 로마제국과 비잔티움제국, 페르시아제국을 비롯해 이슬람교가 퍼진 이후 들어선 주요 왕조들이 모두 실크교역을 국가가 독점했다. 실크를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된 이후에는 실크제작도 모두 국가독점으로 진행됐다.

주요 사치성 교역품목에는 각종 향 제품과 후추 같은 향신료가 포함됐다. 중세에 후추 교역은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인도 산지에서 후추 1g이 1~2g의 은과 교환됐지만 알렉산드리아나 알레포에 이르면 은 10~14g의 가치로 껑충 뛰었다. 베네치아에서 후추 1g은 은 14~18g으로 교환됐고, 독일에선 은 20~30g을 줘야 후추 1g을 구할 수 있었다. 이밖에 보석과 상아, 희귀 목재 등도 주요 교역품목에 이름을 올렸다. 후대로 가면 커피와 차, 아편, 도자기도 주요 교역품목이 된다.

또 중동의 대외 교역품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예다. 노예 교역은 인권의 가치를 주목한 이슬람교가 널리 퍼지면서 역설적으로 시장이 확대됐다. 과거에는 전쟁 포로나 죄인이 노예로 대량 공급됐고, 공급지역도 중동지역 내부에 있었지만 이슬람 율법에서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자 ‘국제적’으로 노예 공급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지역 내부에서 노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면서 변경지대 이교도를 노예화 하는 작업이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노예의 자식은 노예가 된다는 원칙은 유지되면서 젊은 여성 노예가 가장 값이 잘 나갔다. 젊은 남자 노예는 거세를 시켜 환관으로 공급할 수 있었기에 가격이 꾸준히 올랐다. 더구나 이슬람 율법에서 신체훼손을 금지한 탓에 이슬람 지배영역 밖 국경지역 ‘공장’에서 거세된 남성이 대량생산돼 이슬람 영내로 수입됐다.

주요 노예공급지역은 동유럽과 유라시아 스텝지역, 아프리카였다. 때로 인도와 중국 등에서도 소수지만 노예가 수입됐다. 영어에서 노예를 뜻하는 ‘slave’의 어원이 된 슬라브인들은 서유럽 노예상들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무슬림들에게 팔렸다. 동유럽에선 오스만제국의 영역이 발칸반도까지 넓어지면서 중간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슬라브족 노예가 곧바로 충원됐다. 17세기까지 지중해 바르바리 해적을 통해 유럽인들도 이슬람 세계에 노예로 팔려갔다.

때론 바르바리 해적은 장기 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1627년 바르바리 해적은 아이슬란드까지 가서 포로 242명을 잡아서 알제리 시장에 팔았다. 1631년 6월20일엔 아일랜드 볼티모어에 바르바리 해적이 출몰해 107명을 잡아간 뒤 다른 곳에서 포획한 47명을 더해 이슬람권 시장에 팔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중앙아시아에선 유목민들이 러시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지 마을에서 주민을 잡아가 노예시장에 내놨다. 이를 두고 ‘스텝의 수확(the harvest of the steppes)’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전근대 시기 이슬람권의 산업기술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지만 교역 측면에선 여건이 좋았다. 산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인력과 축력이 주로 이용됐다. 풍력과 수력을 이용한 풍차와 수차는 사용되긴 했지만 유럽 보단 널리 퍼지지 못했다. 자동화기기는 간혹 만들어지긴 했지만 장난감 정도에 응용됐다.

에너지 관련 기술에서 중동이 뒤쳐진 것은 서유럽과 같은 목재나 석탄, 목탄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계 탓이 컸다. 유럽에 비해 강의 수도 적었고 낙차가 크지 않아 수력을 활용하기도 쉽지 않았다. 석유가 물론 많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에너지원으로 적극 파낼 기술도 없었고, 석유를 채굴해도 바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목재와 금속산출이 적다보니 바퀴가 달린 탈것의 숫자도 적었다. 이는 도로망 같은 교통시스템 개선을 더디게 했다. 14세기에 모로코 출신이었던 이븐 바투타가 중동을 지나 중앙아시아를 가는 도중 투르크인들이 바퀴달린 수레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선 “신기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여행가 볼니는 “시리아 전체에서 마차를 볼 수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고 했다. 교통은 대부분 낙타 같은 동물을 통해 이뤄지거나 수운을 통해 이뤄졌다. BC2000년경부터 운송에 활용된 낙타는 하루에 1200파운드의 짐을 싣고 200마일을 갈 수 있었다. 17일간 물을 마시지 않고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전근대 시기 기술로는 낙타보다 더 유용한 교통수단을 마련하는 게 불가능했고, 그 이유로 대체품을 만들려는 노력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모로코부터 북아프리카, 중동을 거쳐 인도 중국에 이르는 지역이 단일한 정치, 문화적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장거리 교역에는 최적의 조건이 마련됐다. 아랍어는 이 지역의 공통언어로서 각종 지역 간 거래에서 사용됐다. 이슬람 세계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아랍어는 여러 방언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공통언어였다. 일한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웃딘은 “기독교 세계는 25개 언어가 쓰이고 서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슬람권과 비교하는 촌평을 하기도 했다. 무슬림들의 성지 메카 순례를 의무화한 점도 지역 내 교역을 활성화했다. 단일한 종교, 도덕, 사법적 기준이 확립된 것도 의미가 컸다. 이슬람교는 사막과 베드윈 문화를 기반으로 퍼져 나갔지만 지중해와 홍해, 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해상무역 네트워크는 여전히 이슬람 경제권의 중추 역할을 수행했다.

교역 거점은 알렉산드리아와 알레포가 중심이었다. 여기에 스미르나, 타브리즈, 헤라트 등의 도시도 장거리 교역에 참여했다. 시리아의 주요 항구인 안티오크와 라타키야, 트리폴리, 비블로스, 시돈, 티레 등도 그리스와 이탈리아 상인들로 북적였다. 교역 대상 도시는 유럽에선 바르셀로나, 마요르카, 피렌체, 리보르노, 피사, 제노아 등 다양했다.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는 베네치아였다.

인도양 방면으론 푸스타트, 지다, 아덴, 수하르, 시라프 등이 주요 교역항이었다. 이들 항구는 중국 등 인도양을 통한 동방무역의 주요 관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인도양 방면 무역과 달리 지중해를 통한 해상교역의 과실은 이슬람권이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챙겼다. 동로마제국과 특수 관계를 맺은 베네치아는 레반트 지역교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노예교역과 해적질, 성유물 약탈 등은 수익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고 베네치아는 이런 알짜 사업을 놓치지 않았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한 덕에 교역 주도권을 유지했다. 앞서 알렉산드리아에선 1215년에 이미 3000명의 유럽 상인이 활발하게 활동할 정도로 유럽인들이 더 적극적이었던 면도 있다.

이슬람 종교·정치 지도층은 경제에 적극 개입하면서 결과적으로 경제를 위축시킨 측면도 있다. 예언자 무하마드의 언행인 ‘하디스’에 “오직 신만이 가격을 고정할 수 있다”고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자주 가격을 고정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다. 무슬림 집권층은 소위 ‘공정한 가격’에 시장가격을 고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정치권력의 욕심도 컸다. 이집트 마믈룩 왕조에서 지배층은 후추 교역에 세금을 부과해 수익을 얻느니 아예 후추교역 사업을 통째로 가져와 그 이익을 모두 취하고자 했다. 마믈룩 왕조 술탄이었던 바르스베이는 이 같은 독점정책을 극단으로 몰고 갔고, 이는 유럽에서 포르투갈이 새로운 후추 공급원을 찾아 아프리카 희망봉을 도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쿠란』에서 이자를 엄격하게 금지한 영향으로 금융과 신용관련 발달이 늦어졌다. 이자가 금지되면서 자본축적도 더뎠다. 라마단 금식기간으로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도 크게 줄었다. 이슬람권에선 ‘힐라 샤리아(hila shar'iyya'·legal device)’라고 불린 처방을 통해 이슬람 율법을 지키면서도 신용을 창출하고 투자를 이루며 파트너십을 맺고 은행업까지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지만 효과는 부차적이었다.

이 같은 이유들이 중첩되면서 교역대상이었던 유럽인들은 신항로 개척에 나섰다. 그 결과, 중세 중동의 수출품들은 유럽인들이 아시아 항로를 개척하고 신대륙의 금은이 들어오면서 점차 경쟁에서 밀려났다. 당장은 이들 교역 우회로가 금, 보석, 비단, 상아, 진주, 향신료, 커피, 차, 아편, 도자기, 태피스트리의 교역량을 크게 갉아먹지 않았다지만 근본적인 경제의 큰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기에 알레포를 비롯한 이슬람권 주요 도시들도 유럽 못지않게 흑사병의 피해를 입으면서 위축됐다.

무엇보다 상업에 무관심한 군사 집단이 장기간 중동 지역 정치를 지배하면서 교역을 쇠퇴시킨 면이 적지 않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이 지역 땅을 지배하고, 주요 해양도 잠시 장악했지만 결론적으로 교역 주도권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몫이었다. 유럽의 상인들은 조용하고도 ‘평화롭게’ 시장을 장악해버렸다. (끝)


***참고한 책***

Bernard Lewis, 『The Middle East-2000years of History from the Rise of Christianity to the Present Day』, Phoenix 2000

Eugen Wirth, ‘Fernhandel und Exportgewerbe im islamischen Orient’ in Helga Breuniger·Rolf Peter Sieferle(Hg.) 『Markt und Macht in der Geschichte』, DVA 1995

K. N. Chaudhuri, ‘The Economy in Muslim Societies’ in Francis Robinson(Edited),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Islamic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Karen Armstrong, 『Islam- A Short History』, The Modern Librar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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