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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을 수백명 거느린 황제는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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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증권부 기자) 중국 한나라 황제는 정부인인 황후는 1명을 두고 후궁을 여러 명 거느릴 수 있었다. 후궁은 미인(美人), 양인(良人), 팔자(八子), 칠자(七子), 장사(長使), 소사(少使) 등 여러 등급으로 나뉘었다.

중국 황제의 황후 숫자에 대한 규정은 후대로 갈수록 보다 구체화된다. 당나라 때 기록인 『당육전』에는 황제가 부인으로 황후 외에도 부인 4명, 빈 9명, 첩여 9명, 미인 9명, 재인 9명, 보림 27명, 어녀 27명, 채녀 27명 등 총 121명의 후궁을 둘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황제들이 이같은 후궁 숫자를 ‘입바이’ 다 채운 것은 아니었다. 당나라 현종은 비 3명, 의(儀·빈에 해당) 6명, 미인 4명, 재인 7명 등 총 20명의 후궁‘만’ 뒀다고 한다. 이처럼 규정상 최대치의 6분의 1만 후궁을 뒀던 것은 현종이 성군임을 과시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후대 역사학자들은 해석한다. 아들의 부인인 양귀비를 가로채 사랑했던 현종에게 엄청난 자제력과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긴 힘들었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후궁 외에도 궁궐의 여러 사무를 관장하는 여자 관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궁관이라고 불렸다. 궁관의 총수는 283명으로 황제와 황후, 후궁들의 음식과 의복, 거마, 약 등 일상생활에 관한 일을 맡았다. 그리고 이들 궁관의 지휘 아래 직접 허드랫일을 하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신당서』에 따르면 현종 시기에는 이들 여인만 4만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후대인 청나라 때를 살펴보면 강희제는 30명의 여인에게서 56명의 자녀를 뒀다고 한다. 강희제는 아들들에게 “나는 단지 300명의 여인만 곁에 뒀고 그 가운데 자신을 모셔보지 못한 여인들은 서른이 되면 결혼하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자식들에게 금욕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물론 사서에 기록된 숫자를 그대로 믿긴 힘들지만 절대권력을 이용해 개인의 성욕을 마음껏 해소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한나라 무제는 1만명의 여인들을 낙양의 궁전에 끌어모은 뒤 매일 밤 양이 모는 수레(羊車)를 타고 지나가다 양이 멈추는 곳에 자리한 여인과 하룻밤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만명 이상의 후궁들은 무제의 양차(羊車)가 자신의 방 앞에 서도록 양이 좋아하는 대나무 잎을 꽂아놓고 소금물을 뿌리며 경쟁을 했다고 한다. 수나라 양제도 6000명의 후궁을 뒀다는 전설 같은 얘기를 남겼다.

최근 각종 비리와 부패 혐의로 저우융캉(周永康) 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법정에 서게 됐다. 중국 언론은 경쟁적으로 저우융캉의 간통·성매수 등 호색 행각을 보도하고 있다.

유명 여가수와 국영 CCTV 아나운서 등 그가 거느린 정부가 최소 28~29명에 이르고 성관계를 가진 여성만 400명이 넘는다는 식이다. 6곳의 ‘행궁(行宮)’에서 성 상납을 받고 파티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백계왕'(百鷄王:100명의 암탉을 거느린 왕)’이라는 비아냥 섞인 표현까지 나왔다고 한다.

중국의 현 지도부가 정적을 제거하는 방식이 치졸하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중국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전통시대 황제가 부럽지 않은 삶은 살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끝)


****참고한 책****

리카이위엔, 진시황의 비밀, 하병준 옮김, 시공사 2010
김택민, 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8
시앙쓰, 관능으로 천하를 지배한 구중궁궐 여인들, 신종욱 옮김, 미다스북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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