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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역사서에 씌인 믿기지 않는 식인(食人)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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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증권부 기자) 우웬춘의 엽기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경기도 수원 인근 야산에서 이번엔 장기가 없는 토막살인 사체가 발견돼 세간이 시끄럽다. 온라인 상에선 끔찍한 살인 행태 탓에 장기밀매나 인육거래와 관련한 각종 우려도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다. 엽기적인 살인사건 관련 소식을 접하면서 ‘인육’ ‘식인’과 관련된 과거 역사의 어두운 단면들이 다시 떠올랐다.

동양의 주요 역사서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뜻의 ‘상식(相食)’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의 주요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에도 인육을 먹었다는 사례가 간혹 나온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상식(相食)’이란 표현은 이런 저런 인용문과 외국사례, 비유적 표현을 포함해 총 61건이 검색된다.

‘인육을 먹는다’는 끔찍한 일은 절대기근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급박한 최후수단으로 역사서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중국의 각종 사서에는 다른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안될 만큼 식인과 관련한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 지진과 홍수, 산사태, 메뚜기 떼의 등장 등 빈발한 자연재해에 따른 대기근에다가 정치적 혼란이 겹친 난세에 주로 식인 기록이 많이 남겨졌다.

『수호전(水滸傳)』같은 문학작품에는 등장인물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먹는 장면이 묘사됐고, 일부 ‘약용’으로 사람을 잡는 천인공노할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식인’이 강제되는 때는 전란이나 곡가 급등으로 다른 먹을거리를 구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이 대다수여서 통계화 하는데 어려움이 많긴 하지만 중국 전통시대 사료를 살펴보면 곡물가 변동은 매우 심했다. 『한서(漢書)』 식화지는 “곡물가는 보통 한 말에 40~50전 가량 하지만 풍년이 들면 한 말에 4~5전까지 내려간다”고 기술했다.

반면 흉년으로 곡가가 비싸지면 한말에 1000전을 넘어 평년 대비 20배 폭등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섞인 표현일 듯 하지만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곡식 한 말에 70만~80만전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명나라 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통시대 생산력의 한계 탓에 명대에도 기근의 위협은 상존했다. 자연스럽게 정사인 『명사(明史)』에도 식인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고려대 김택민 교수가 정리한 기록들을 일부 간추려 보면 1457년에는 “북기와 산동에 기근이 들어 무덤이 파해져졌고 도로의 가로수는 모두 베어졌다”며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473년에는 “산동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백골에는 살이 붙어있지 않았다”고 묘사됐다. 1487년 섬서 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무공지방 민이 투숙객을 죽여서 먹었다”고 전한다. 1504년에는 “회(淮)·양(揚)·려(廬)·봉(鳳) 지방에 연거푸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매장한 시체를 파내서 먹는 일이 계속됐다”는 암울한 기술이 등장한다.

1636년에는 “남양에 큰 기근이 들어 어머니가 딸을 삶아먹은 일이 일어났다”는 비극을 전한다. 1637년에는 절강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었다고 표현됐다. 1641년 기록에선 “기남과 산동지방에 연거푸 기근이 들었다”면서 “덕주에선 쌀 한 말에 1000전이어서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행인이 끊기고 큰 도둑이 창궐했다”고 급등한 곡가와 식인의 비극 간 상관관계를 증명하고 있다.

명대 후반의 정치 불안은 ‘식인’이란 극단적인 상황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 명나라는 가뭄과 홍수, 메뚜기 떼가 십 수 년간 창궐하면서 영역 전체가 대기근에 시달렸다. 특히 낙양 부근의 하남의 사례는 ‘폭정’과 ‘식인의 대상’이 교묘하게 얽힌 재미있는 사례다. 당대의 사서들은 1628년부터 이 지역이 극심한 재해에 시달렸다고 전한다. 메뚜기 떼가 매년 창궐해 들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수확을 못해서 쌀 한 말에 3000전에 달하니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낙양을 다스리던 명나라 신종의 셋째 아들 복왕(福王)은 이런 상황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사치스런 생활만 계속했다.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으로 명나라가 무너진 뒤 복왕은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그들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됐다. 복이 많은 왕이란 뜻의 ‘복왕(福王)’이란 타이틀과 달리 지지리도 복이 없었던 셈이다.

오위업(吳偉業)은 『녹초기문(鹿樵紀聞)』이란 책에서 “복왕과 세자가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가 도망쳤지만 왕은 몸이 비대해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도적들에게 잡혀 살해됐다. 몸무게를 달아 보니 360여근(180kg)이었다. 팔다리를 자르고 살코기를 저며 사슴고기와 섞어 끓여 둘러앉아 먹었다. 이 잔치를 복왕이 내린 연회라는 뜻으로 복록연(福祿宴)이라고 불렀다”고 묘사했다.

1642년 이자성군의 개봉 공격 당시를 그린 『대량수성기(大梁守城記)』에는 “(이자성 군에 포위된 개봉) 사람들이 다투어 사람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죽은 사람을 먹었다. 그러자 사람 죽은 집에서는 곡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어서 유인해서 잡아먹기도 하고 강제로 끌어다가 잡아먹기도 했다. 9월 초에 이르자 아버지와 아들, 형제가 서로 잡아먹어 백골이 길을 덮었다. 처음에는 익혀 먹었으나 나중에는 생으로 먹었다”고 전한다.

명나라 말기는 중국 전역에 걸쳐 농촌의 계층분화와 호구(戶口)격감, 인구이동, 반란과 봉기가 이어진 시기였다. 명조의 재정수요는 꾸준히 늘어난 반면 관료와 거인(擧人), 감생(監生), 생원(生員) 등 학위소지자를 합쳐 면세특권이 있는 특권층 수가 10만 명에 달했다. 명초에는 특권층 수가 전국민의 0.15% 수준에 불과했지만 15세기 중엽에는 35만 명으로 늘었고, 명말이 되면 전인구의 0.37% 수준인 55만명 수준에 이르렀다.

이들이 토지를 겸병하면서 국가로부터 조세부담은 벗어나고 부·역을 기피하면서 힘없이 모든 부담을 떠맡게 된 농민들만 극한의 사지로 내몰렸던 셈이다. 관리와 서리의 가렴주구, 토지의 편중과 부·역의 불균등, 상인과 고리대자본의 수탈은 명중기 이후 농민 몰락의 종합 교향곡이었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 생지옥의 배경음악이었다.

중국에서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 러시아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아비규환이 빚어졌다. 러시아는 16세기말 17세기 초 정치·경제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 시대는 ‘동란의 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The time of troubles)’라고 불린다.

특히 1601~1603년의 ‘대기근(Великий голод)’은 러시아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의 삶을 극한으로 몰고 갔다. 1601년 가뭄과 기근은 농민들에겐 대재앙이었다. 여름에 10일간 연속으로 폭우가 쏟아지면서 작물 대부분이 썩어버렸고 8월에는 대규모 우박 피해를 입으면서 남은 작물마저 씨가 말랐다. 그 여파로 저장한 곡물가격은 평상시의 12~15배로 뛰었다.

재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602년에도 흉년이 닥쳤다. 그리고 1603년에도 흉작이 이어졌다. 3년 연속 흉작으로 식량사정은 대재난 수준에 이르렀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당시 남미 페루지역 화산폭발의 여파로 전 지구적 기상이변이 발생해 러시아에 대흉작이 미쳤다고 추론한다. 3년 기근으로 곡물가는 폭등했다. 빵 값은 결국 백 배 이상 뛰었다.

당대의 사료들은 “첫해 크게 뛴 곡물가격이 다시 6배 뛰고, 또다시 거기서 3배가 더 올랐다”고 급박한 상황을 묘사했다. 힘 있는 종교기관과 영주들이 농민들을 돕기보다는 예비용 곡물을 사재기 해놓고 곡물가가 더 오르기를 기다렸다. 때로는 곡식을 숨겨놓고 농민들의 원성에는 귀를 막고 자신들의 먹을 것만 챙겼다. 그러는 동안 농민들을 굶어죽어 갔다.

농민들은 빵과 일자리를 찾으러 고향을 등졌다. 거대한 거지 떼가 모스크바로 몰려갔다. 하지만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서도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당대의 사료들은 모스크바에서만 매일 90~300명의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고 묘사했다. 여기에 기근을 피하는 동시에 농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모스크바 제국의 남부 변두리 숲으로 달아나는 사람의 수도 적지 않았다.

당대의 문학작품인 『아브라미 팔리츠인의 설화』에선 이때의 사회상을 “장작을 구하러 갔던 사람이 도시로 돌아와서는 장작을 거두면서 피를 흘렸다는 것을 알았다네. 자신의 피를 흘린 대가로 장작더미와 마른 가지들을 가져왔다네. 그들은 매일 먹을 것을 준비하기 위해 땔감을 공급해야만 했다네. 어린잎들을 베어내고, 어린 나뭇가지들을 가져왔다네. 마치 새들이 사람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는 것같이”라고 비유적으로 읊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와 귀족들은 농민에게 가혹했다. 당시 러시아는 지방의 납세를 전담시키는 대행업자에게 국고에 손실이 발생할 경우 배상하도록 하는 신탁(доверие)의무를 강제했다. 또 납세민 공동체가 적당한 신탁 담당자를 선발하지 못할 경우 연대책임(круговая порука)을 부과했다. 조세 할당 방식과 대상이 세분화 되면서 농민(крестьянин)과 빈농(бобыль)이 구분된 것도 이때다. 16세기 말부터 농민의 이주권리는 급격히 퇴화됐고 채무관계로 지주에 대한 예속상태는 강화됐다. 이 시기 러시아를 관찰했던 쉴이라는 외국인은 “지주들이 자신의 농민들을 농노(крепостной)로 보는데 익숙하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의 분노가 거세지고 “신의 처벌”이라는 루머가 돌면서 차르 지위를 찬탈했던 보리스 고두노프의 모스크바 정부는 낮은 고정가격에 비축 곡물을 내놓으려 했다. 하지만 대재난 앞에선 공급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모스크바에서만 당시 아사자가 10만 명을 넘었다. 정부군이 매장한 시체만 12만7000구에 이르렀다고 당대 사료들은 전한다. 그나마 많은 사망한 사람들을 묻을 여력도 없어 시체 썩는 악취가 온 도시를 뒤덮었다. 러시아 전체에선 50만 명이 사망했다는 추정부터 당시 1000만 인구 중 3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설까지 제기된다.

굶주린 사람들은 말과 개, 고양이는 물론 풀뿌리, 나무껍질, 동물의 사체 등을 닥치는 대로 먹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인이나 자식과도 한 줌의 음식을 나눠먹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사태도 속출했다. 외부인이 머문 호텔은 투숙객이 순식간에 식사거리로 전락하면서 ‘정육점’이 돼 버렸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네 명의 여인이 시장에서 목재를 살 것처럼 농부를 유인한 뒤 죽여 식량으로 삼았다가 발각됐는데 그 농부가 이들 주부살해단의 세 번째 희생자였다는 당대의 조사기록도 있다. 굶주린 농민들은 도적떼로 변해서 먹을 것을 찾아 이웃마을을 공격했고, 때로는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천수답식 농업 생산에 전적으로 생존을 의존했던 시기에 동서양 가릴 것 없이 강제로 극한으로 몰렸던 힘없는 사람들이 취한 최후의 수단이 ‘사람이 사람을 먹는’ 비극이었던 셈이다.(끝)


*** 참고한 책과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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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짜이푸, 『쌍전-삼국지와 수호전은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 임태홍·한순자 옮김, 글항아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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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꼴라이 깔리니꼬비치 구드지,『고대 러시아 문학사 2』,정막래 옮김,한길사 2008

바실리 오시포비치 클류쳅스키,『러시아 신분사』,조호연·오두영 옮김, 한길사 2007

Nicholas V. Riasanovsky,『A History of Russia』,Oxford University Press 1993

Geoffrey Hosking,『Russia and the Russians-A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2001

Владимир Богуславский, ‘Голод 1601~1603 годов’

( http://www.hrono.ru/sobyt/1600sob/1601golod.php )

В.В. Курасова, А.М. Некрича, Е.А. Болтина, А.Я. Грунта, Н.Г. Павленко, С.П. Платонова, А.М. Самсонова, С.Л. Тихвинского(редакцией), ‘История России-Голод 1601~1603 годов’

(http://www.history-at-russia.ru/xvii-vek/golod-1601-1603-godov.html )

‘Неурожаи и голод 1601~1603 гг’

(http://russkie-tsari.ru/index.php/razdel-iii/boris-fedorovich-godunov-1552-1605/item/44-neurozhai-i-golod-1601-1603-g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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