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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원내대표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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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연 정치부 기자) “가장 슬픈 법이 너무 슬프게 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직 이렇게 밖에 힘이 되지 못해서... 흔들리는 조각배에서 활을 들고 서서 법을 만드는 그런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힘 닿는 데까지 더 노력하겠습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1일 안산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 분향소를 찾아 남긴 글입니다. 5월 8일 원내대표로 취임한 이래 장장 5개월 동안 세월호 특별법 합의를 위해 노력했지만,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이 동의하는 안을 만들지 못했다는 자책이 묻어납니다. 박 원내대표는 결국 2일 원내대표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박 원내대표를 지켜본 한 측근은 “지난 이틀간의 협상에서 박 원내대표가 많이 힘들어했고, 협상 과정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실제 지난 29일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의 협상이 진행된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는 고성과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 원내대표는 박 원내대표에게 “1차‧2차 협상안이 줄줄이 파기된 만큼 유가족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오지 않으면 협상을 진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박 원내대표를 압박했습니다.

1차‧2차 협상안이 줄줄이 파기된 이유로 ‘과정상의 문제’를 꼽는 이가 많습니다. 결과물과 상관없이 박 원내대표가 협상 과정에서 유가족을 설득하고 당내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박 원내대표의 ‘법사위원장’ 경력이 오히려 협상 과정에서 ‘독(毒)’이 됐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박 원내대표는 19대 국회 전반기 법사위원장을 맡아 맹활약했습니다. 박 원내대표의 한 측근은 “(세월호 특별법 협상 과정에서) 법을 잘 몰라서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잘 안다고 생각해 자신의 안을 관철시킨 것이 화근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8월7일 1차 협상 당시 박 원내대표는 새누리당이 야당의 특검 추천을 결사 반대하는 상황에서 진상조사위원회라도 ‘5(여당):5(야당):4(대법원·대한변호사협회):3(유족 추천)’으로 구성하는 것이 실효성 있는 대안이라며 합의문을 작성했습니다.

기존에 새정치연합이 가지고 있던 안은 유가족 추천 인사의 비중이 한 명 더 적은 ‘5(여당):5(야당):4(대법원·대한변호사협회):2(유족 추천)’이었습니다. 유족 추천위원 2명으로는 실효성이 없으니 3명으로 늘리자고 주장한 게 박 원내대표입니다.

협상 결과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협상 과정에 있었습니다. 과거 법사위원장으로서 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판단, 유가족 설득 작업이 부족했던 겁니다.

8월19일 2차 협상 당시에는 입법로비 청탁 및 금품수수혐의를 받은 야당 의원 3인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황에서 본회의를 열어 달라는 이들 의원들의 ‘요청’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새누리당 측에서도 8월19일 세월호 특별법을 합의하고 협상안에 대해 새정치연합 의원총회에서 추인을 받을 경우, 여야 공동으로 본회의를 개최하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불체포특권에 따라 국회의원은 현행범이 아닌 한 회기 중에는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습니다. 여러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제정된 박 원내대표의 2차 합의안은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의 추인을 받는 데 실패했고, 새정치연합은 19일 23시59분에 단독 임시국회를 소집해 ‘방탄국회’를 시도했다는 여론비난을 뒤집어 써야 했습니다.

특별검사 추천위원 중 한 사람인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의 임기가 곧 끝나는 것도 박 원내대표가 협상을 서두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위철환 대한변협 회장은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박 원내대표는 현재 변협 지도부의 임기가 내년 2월까지인 만큼, 그 전에 특검 추천 작업을 끝내야 유가족이 원하는 특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9월30일 3차 협상 과정에서도 박 원내대표는 수 차례 전명선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원장과 통화를 하고,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여야와 유가족이 특검 후보 4명을 추천한다’는 야당의 주장에 대해 새누리당은 “피해자가 직접 특검 후보를 추천하도록 할 수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예고한 19시 본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박 원내대표는 전 위원장에게 유가족이 특검 후보 추천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여야가) 유가족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다’는 문구나 ‘유가족의 참여 여부를 추후 논의한다’는 문구 중 하나를 선택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전 위원장은 둘 다 받을 수 없지만, 굳이 꼽자면 후자를 택하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처럼 박 원내대표의 3차에 걸친 협상 과정에는 수많은 ‘뒷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박 원내대표가 원내대표직을 떠나며 “협상 과정에서 제가 받은 비난들 중 상당 부분에 대해 드릴 말씀도 많지만 그저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박 원내대표가 협상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를 소홀히 했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당내 상황이 혼잡하고 동료 의원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유가족과 이 원내대표 사이에서 이뤄진 협상은 박 원내대표의 말 그대로 ‘흔들리는 조각배에서 활을 들고 서서 법을 만드는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04(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