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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야금 연주자 이하늬 "혹독하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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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영 한경 텐아시아 기자) 배우 이하늬가 아닌 4세 때부터 가야금을 연주한 인간문화재 전수자 이하늬와 마주했다. 아니, 그보다 인간 이하늬와 마주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하늬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동시에 무대를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하는 영혼이었고, 자각이 있던 시절 이미 가야금을 연주했던 이로서 그의 인생에서 결코 가야금을 떼놓고 설명할 수 없는 음악인이기도 하다. 다양한 이름이 곧 이하늬이니, 굳이 이름별로 그를 분리할 필요는 없다.

이하늬는 26일과 27일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제2회 의정부 국제 가야금 축제 무대에 선다. 어머니 무형문화재 문재숙 이화여대 교수, 친언니인 가야금 연주자 이슬기도 함께 오른다. 음악인 가족 사이에서 성장한 배경 역시도 이하늬를 설명할 수 있는 주요한 대목이리라.

이하늬에게 가야금에 대해 물었더니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가족을 이야기하니 배우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 인생이 들렸다. 그리고 결국은, 이하늬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이 되었다.

Q. 이번에 의정부에서 가야금 연주를 하게 됐다. 가족들과 함께라 더욱 의미가 깊을 텐데, 가족들과 음악인으로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하늬 : 일단 26일 하루만 무대에 선다. 그리고 예전에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이 버거운 적도 있었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좋다. 서로 너무 바빠 같은 집에 살아도 얼굴 한 번 못보고 잠들 때도 있는데, 연습할 때 만나니 좋더라. 그러면서 투닥거리기도 하고. 아무리 어머니라도, 이제 자식들 머리가 다 커서 음악적인 소견들이 있으니 컨트롤이 안된다. 이제 우리보다는 어머니가 힘드실 것이다. (웃음)

Q. 어머니가 딸들을 동등한 음악인으로 대우하는 편인가.

이하늬 : 그렇다. 우리 의견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음악적인 것도 삶에 대한 것에 대해서도 친구처럼 다가오신다. 어머니가 먼저 권위를 다 내려놓아 주시더라. 예를 들어, 저희가 엄마께 ‘음이 약간 높은 것 같아요’라고 말씀 드리거나 색다른 것들을 제안하면 ‘한 번 해보자’ 하신다. 그 과정에서 음악이 점점 풍성해지기도 한다.

Q. 이번 공연은 당신이 주로 선보였던 현대적 색감의 연주보다는 전통적 방식에 가까운 듯 한데.

이하늬 : 1부가 그런 방식이라면, 2부는 새로운 시도들도 선보인다. 2부에서 ‘You Raise Me Up’을 새롭게 편곡해 들려드릴 것이다. 가야금을 퓨전으로 작업한다는 것 자체가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방식이다. 현 시대가 좋아하는 것들을 거짓없고 꾸밈없이 선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전통이란 말이 굉장히 아이러니하지만 끊임없이 생각하고 다가가야 하는 부분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가야금, 국악을 했는데 ‘왜 한국문화인데 한국사람들이 향유하지 않을까, 사랑하지 않을까’ 라는 점이 그 나이에도 고민이었다. ‘언제까지 박제시켜 놓은 음악을 해야 하는가’, ‘우리끼리의 잔치를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늘 들었다. 물론 이런 영역에 있어 의견들이 다 다르고, 꺼내면 불편한 이야기가 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새로운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Q. 문재숙 교수의 경우에는 그런 색다른 시도에 열려있는 편인가.

이하늬 : 어머니가 선봉자다. 난 이런 정신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아니, 때로는 우리보다 더 열려 계신다. 문화재로서 여기까지만 하셨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는데, ‘음악에 위선이 없어야 한다.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파격적으로 본인이 직접 가야금 반주에 스포츠댄스를 하신 적도 있다. 그렇게 툭툭 해주시니 뒤에 가는 제자들이나 팔로워들이 편하게 갈 수 있는 부분들이 분명 있다.

Q. 배우 이하늬로 더 잘 알려지게 됐지만, 4세 때부터 갸아금을 연주했다. 당신에게 가야금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이하늬 : 처음에는 무얼 모르고 시작했으나, 이제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학창시절 나는 다른 짓을 많이 했다. 언니는 가야금을 연주자로서 잘 성장한 케이스인 반면, 나는 중학교 때 그림 그리겠다고도 했고 춤도 췄다. 하지만 살벌한 입시는 매번 성실하게 통과했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지금도 악몽으로 시험, 수능, 재수 등을 꿈꾸지만 말이지. 아무튼 이제 가야금은 내게 분신같은 존재다.

Q. 가야금이 버거운 족쇄가 됐던 시절에 대해 더 들려달라.

이하늬 : 예전에는 운명처럼 정해진 길이 너무 싫었다. 숨 막혔다. 언니도 갔던 길 그 전에 어머니도 갔던 길을 나도 같이 가야 하는 이유를 질문했다. 그래서 다른 짓도 많이 했다. ‘내 길이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고민이 됐다. 막연히 종합예술 형태의 뭔가를 갈망했던 것 같다.

Q. 그렇지만 가야금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오랜 시간 버틴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하늬 : 그렇다. 가야금은 너무나 섬세한 악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이나믹한 매력이 있다. 타악이 다이나믹을 준다고 하지만 현악이 끌어주는 다이나믹이 중요하다. 풍부하고 섬세하고 여린 동시에 명주실로 이뤄진 가야금의 소리는 질박하고 소박하기도 하다.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것 같다. 얼마나 섬세한지, ‘칸타빌레=노래하듯이’를 벗어나 국악 선생님들의 악보를 보면 ‘남자가 여자를 타이르듯이’ 등으로 굉장히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다. 그리고 그 섬세한 음은 40대가 클라이막스다.

Q. 40대?

이하늬 : 40대가 손도 원활하고 삶의 깊이, 인생에 대해 알 때 쯤인데, 그때야 진짜 산조를 탈 수 있다고들 하신다. 10대 20대는 아무리 잘 타도 낼 수 없는 성음이 있다고 하는데, 나 역시 20대와 30대의 소리가 달라 40대의 소리가 궁금하다. 악기를 놓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다. 정말 나이들수록 깊어지지 않나. 그러니 음악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폭도 깊어진다. 그것은 연기와도 비슷하다. 나는 예술이란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진정성, 아티스트의 태도 등은 비슷하다고 본다.

Q. 가야금을 그토록 오랜시간 했기에 이제 당신의 인생에서 가야금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이하늬 : 만약 가야금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기고만장했을 것 같다. 악기를 통해 배운 것들이 너무 많다. 4세 때부터 시작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입시를 경험했다. 그 어린 나이에 20명 가까이 되는 가야금을 함께 하는 동급생들과 있는 자리에서 ‘너희들 중 소수만이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이 정해져 있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 혹독한 과정에서 나는 내 스스로를 믿지 않게 됐다(웃음). 사실 이런 입시경험은 썩 좋은 것은 아닌데, 여하튼 그 과정에서 나는 죽기살기로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국악중학교 입시에 떨어지면 공장에 가라는 아버지 말씀을 들었다. 가창시험 전 날 고열에 시달린 날 보고 ‘나가서 한 바퀴 뛰고오라’는 말씀도 하셨다. 사무칠 때도 있었으나 정말 강하게 트레이닝이 됐다. 그러면서 천재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는 말이 내게는 당연한 진리가 됐다. 탤런트도 중요하지만 99%의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내 경험으로 알았다. 예술하는 사람에게 있어 성실함과 책임감이 수반되지 않으면 자유가 방종이 된다는 것도 뼈에 새기게 배웠다.

Q. 많은 예술가들에게 타고는 재능과 노력 중 무엇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묻게 되는데, 당신의 답은 이미 듣게 됐다.

이하늬 : 중고등학교 때 늘 책상 앞에 ‘노 페인 노 게인’(No Pain, No Gain)을 적어뒀다. 어머니도 늘 내게 ’100번 연습한 놈과 101번 연습한 놈이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예술의 정직함을 체득했다. 연습이 없다면 난 정말 아무 것도 아니구라, 노력이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싶었고, 내가 크리스찬이다 보니 이렇게 노력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일찍 깨닫게 해준 하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Q. 그런 당신을 키운 어머니 역시 예술가인데 노력의 가치를 믿으신 분이었고.

이하늬 : 어머니의 교육방침이 나를 지켰다는 생각도 든다. 난 지금도 춤을 사랑하고 또 중학교 때는 춤이 너무나 추고 싶었는데, 만약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며 자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본다.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끔 내버려두시는 동시에 늘 ‘국고(국악고)는 가야만 한다’고 쐐기를 박았고, 그래서 입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노력은 그 어느 때에도 해야만 했다.

Q. 배우가 된 지금, 악기를 평생한 것은 어떤 영향을 작용하나.

이하늬 : 배우 생활을 하며서 악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배우로서 캐릭터에 몰입해 있다가 촬영이 끝나고 빨리 인간 이하늬로 돌아와야 할 때, 악기는 늘 내게 안착감을 준다. 인간 이하늬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미로에 빠지지 않고 금세 돌아올 수 있게 해준다. 과거에는 내가 캐릭터에 완전히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원래의 내 삶이 행복하고 충만해야만, 그래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자리가 굳건히 있어야만 더욱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구심점에 악기가 있다. 참, 영화 촬영을 하면 서울 부산을 자주 오가게 되는데, KTX에서 흘러나오는 곡이 우리 가족이 속한 이랑앙상블에서 연주한 곡이다. 그 곡을 들으면서도 ‘아 빨리 공연을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어렸을 때는 정말 이런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으나, 이제는 가족과 가야금 속에서 더 자유로워진다. 과거의 시간을 다시 겪으라면 못하겠지만(웃음), 그래서 지금이 가장 좋다는 생각도 한다.

Q. 원래 어렸을 때 지독하게 노력하고 방황한 이들이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더라.

이하늬 : 대학교 때는 철학에 빠져 더블 메이저로 학위를 받을까 고민도 했으나, 집에서 어서 대학원을 가고 그런 공부는 나중에 학위와 관계없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뚜렷하게 내 길을 정해주시는 부모님 아래에서 한때는 집을 나가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웃음), 결국 돌이켜보면 나는 방황하는 와중에도 부모님 말을 많이 따랐던 편이다. 상상은 한다. 만약 내가 자유롭게 살았다면 훨씬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그렇지만 부모님 곁에서 20대의 나는 나를 찾는 것에 몰두하는 시간도 가졌다. 정말 여러가지를 했고 그런 시도와 실패를 경험한 이후 30대가 된 지금 만족한다. 이제는 무언가 정리된 느낌, 찾은 느낌이 든다.

Q. 과연 어떤 답을 찾게 된 것인가. 당신 자신에 대한.

이하늬 : 결국은 내가 무대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야금 공연이 될 수도 있고 뮤지컬이 될 수도 있다. 뮤지컬에 섰던 가장 큰 이유는 매일 공연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공연을 많이 했던 사람이라 공연을 하지 않으면 미치겠더라. 그렇게 내가 하고 싶어도 안되는 것, 해야하는 것, 하고 싶은데 해야하는 것들이 정리가 됐다.

Q. 이 모든 시간을 거쳐 예술인을 넘어 당신은 궁극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나.

이하늬 : 행복한 사람. 만족할 수 있는 사람. 만족이 없으면 감사함이 없고, 감사함이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 주변을 봐도 많이 가졌음에도 욕심을 내며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부어가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에 힘들어했던 적이 있기에 지금 스스로에게 정직해진 시간에 감사드린다. 사실 부족한 모습을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은 힘들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영역, 신의 영역이 분명히 있고 그런 부분까지 내가 컨트롤 하려고 하면 멘탈은 깨진다. 그 외에도 삶에 있어 밸런스가 중요하다. 내 삶이 피페하고 몸이 망가지는 것은 상관하지 않으며 영혼이 깊어지고 연기가 깊어지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살면서 늘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면서 운동 역시도 중요해졌는데, 20대에는 몸을 무모하게 써도 괜찮았을지 모르나 30대가 되고부터는 운동을 똑같이 해도 근육이 붙는 속도가 다르니 평소 성실하게 운동을 해야만 한다. 이제는 하루하루 성실하게 나를 채우지 않으면 한 방 에너지를 내지도 못한다. 그러니 결국 삶은 성실하지 않다면 싸움이 안되는 것이다. (끝)

사진. 구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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