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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박근혜' 박영선과 나경원의 결정적 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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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태 정치부 기자,국회반장) 여성대통령을 배출했지만 한국 정치권의 유리천장은 견고하기만 하다. 올해 두 차례 선거(지방선거와 보권선거)와 여야 권력지형의 변화 등으로 두 명의 여성정치인이 잠룡(潛龍) 후보명단에 겨우 이름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와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이 ‘포스트 박근혜' 가능성을 제시한 여성정치인으로 꼽힌다. 둘은 3선 정치경력에다 진보와 보수를 대표해 각자 진영에서 폭넓은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 원내대표는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조사한 9월 둘째주 차기대선주자 지지율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의원, 정몽준 전 의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안희정 충남지사, 남경필 경기지사에 이어 8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박근혜 대통령이후 2년만에 여성정치인이 대선후보 명단에 합류한 것이다.

하지만, 당의 계파갈등으로 반강제적으로 비대위원장직을 내려놓은 박 원내대표가 앞으로 현상유지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최근 나 의원을 만나 여성정치인 중 경쟁자를 꼽아달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박 원내대표에 대해서는 “계파 등 세가 부족한 여성정치인의 한계를 절감했고... 안타깝다”고 짧게 평했다. 이어 여성정치인 롤모델로 박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냐고 물었다.

나 의원은 “박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되는 정치적 유산을 갖고 있는 데다 정치 스타일 등 측면에서 여성정치인으로 보기 힘들지 않느냐"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와 나 의원은 정계입문 후 비슷한 정치경력을 쌓았다. 서울시장 당내경선과 본선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박원순 시장에게 패한 것까지 닮았다.

나 의원은 박 원내대표보다 3살 어린 63년생이지만 정계진출은 2년 빨랐다. 판사 출신인 그는 2002년 이회창 대통령후보캠프의 특보로 영입된 후 정치인으로서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얼짱’으로 불리는 탁월한 외모에다 법조인으로 갈고 닦았던 달변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당 대변인을 거쳐 최고위원,서울시장 후보까지 거칠 것이 없었던 그는 당시 안풍(安風·자연인 안철수 인기가 정국을 휩쓸던 현상)을 등에 업은 박원순 시장에게 패하면서 정계입문 후 처음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20% 이상의 지지율 차이를 뒤집는 ‘이변’을 연출하는가 싶었던 나 의원은 ‘여론의 뭇매’란 벽을 넘지 못했다. 그가 1억원 피부과의 단골이었다는 의혹 제기는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막판 판세를 뒤흔들었다. 승자와 패자의 최종 득표율은 53.4% 대 46.2%.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진 ‘1억원 피부과' 논란만 없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란 게 선거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안 연합에 맞서기를 모두 꺼리는 상황에서 나 의원의 출전 강행과 선전은 선당후사(先黨後私)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나 의원은 당으로부터 용도폐기됐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1억 피부과’ 논란에 이어 판사인 남편의 ‘기소청탁’ 의혹까지 불거지자 나 의원을 2012년 총선 공천에서 탈락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다.

나 의원은 당에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2012년 총선불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공천배제에 대해 정계에서는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박 대통령이 차기 대선과정에서 자신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중진을 제거하고 있으며, 나 의원도 그 중 한 명이란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나 의원은 “당이 사당화(私黨化)되고 있다"며 섭섭함을 토로했지만, 당과 박 대통령에 대한 비난 수위는 ‘딱’ 거기에서 멈췄다.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계속 당에 남아 백의종군하겠다"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지지자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 의원이 33개월 야인생활 동안 잊혀지지 않고, 지난 7.30재보궐선거에서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사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퇴진'과 무관하지 않다. 나 의원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정치인의 최대 미덕인 ‘감정 절제력'을 보여준 것이다.

잠재적 경쟁자인 박 원내대표에겐 찾아볼 수 없는 나 의원의 강점은 바로 이것이다. 박 원내대표는 야당의 선거참패 후 비대위원장과 원내대표을 겸임하면서 통합 당권을 거머쥐었지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특히 당내 의원들의 반기에 측근과 언론을 통해 공공연하게 ‘탈당선언'을 한 후 잠적한 것은 당 수장으로서는 물론 정치인의 자격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탈(逸脫)’로밖에 해석될 수 없는 그의 돌출행동은 앞으로 그의 정치행보에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박 원내대표는 나 의원보다 2년 후인 2004년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야권 실세였던 정동영 상임고문의 발탁으로 당대변인을 맡아 승승장구했다. 방송 앵커와 언론사 경제부장 출신의 순발력을 바탕으로 정책위의장을 거쳐 비(非) 법조인 출신 법제사법위원회 첫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여성정치인의 지평을 스스로 넓혀가며 대중적 인지도를 쌓았다.

비록 박원순 후보에게 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함으로써 서울시장을 향한 꿈은 접었지만, 그 패배는 전화위복이 됐다. 2012년 총선에서 3선에 성공했고, 곧바로 법제사법위원장에 뽑혔기 때문이다.

올해 압도적 지지로 제1야당의 첫 여성 원내대표에 뽑힌 것은 정치 인생의 최대 하이라이트였다. 그는 촉망받는 여성정치인에서 단숨에 차기 대권을 가시권에 둔 야권의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경제 전문 기자 출신답게 재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만의 정치적 커리어를 구축했다. 2005년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금산법 정부안은 삼성 봐주기"라는 목소리를 내면서 진보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지난해에는 새해 예산안을 볼모로 잡아 박 대통령이 수차례 당부한 ‘외국인투자촉진법’ 통과를 저지한 것도 박 원내대표였다. 정가에서는 예산통과를 새벽까지 저지한 것을 놓고 “박 대통령에 위에 박영선이 있다"는 말이 회자됐을 정도다.

올해 풍전등화의 제1야당 재건의 중책을 떠안았던 박 원대표는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다. ‘탈당카드’를 접고 당무에 복귀한 그는 당내 강경파들과 맞서 리더십을 복원해야할 만만찮은 숙제를 떠안게 됐다.

박 원내대표와 나 의원 또 하나 공통점은 특정 계파에 묶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세간에 친이계로 알려진 나 의원은 “친이계와 밥 한 번 먹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국회의원이 계파를 갖는 것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다. 계파수장이 아니면 지도자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는데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박 원내대표와 나 의원이 여성의원 중 차기 대권주자급으로 거론되는 것은 특정계파에 묶여 있지 않아서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9.07(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