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취재 뒷 얘기

KT와 SK가 붙은 사연...통신판의 '최초병(病)'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김보영 IT과학부 기자) 오전 여덟 시 54분에 SK브로드밴드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왔습니다. 제목은 'SK브로드밴드, UHD 셋톱박스 상용 1호 가입자 전남 순천에서 탄생'.

조금 기다리면 메일이 한통 더 오겠구나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약 10여분 뒤인 오전 아홉 시 6분, KT에서 'KT, olleh GiGA UHD tv' 가입 개시'라는 보도자료가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지금 SK브로드밴드와 KT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통신판에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같은 서비스를 동시에 준비하면서 출시 시기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겁니다. 통신 시장이 워낙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하는 시장이고, 통신업계 회사들도 경쟁사의 서비스를 금세 따라잡을 여력이 있는 회사들이어서 속도전이 보통 치열한 게 아닙니다.

이번 전쟁의 주제는 UHD(Ultra High Definition·초고화질) 셋톱박스입니다. UHD TV 기술이란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HD(High Definition·고화질) TV 기술보다 네 배 선명한 TV 방송기술을 말합니다. 실물처럼 선명한 화질로 각광받는 차세대 방송기술입니다.

지난달 21일에는 삼성전자가 눈이 좋기로 소문난 몽골인을 불러 실험해 봤더니 실제 화면과 삼성전자의 UHD 모니터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UHD TV 시장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시장입니다. 케이블TV 업계가 지난 4월 UHD 방송 상용 서비스를 제주도에서 열린 2014 디지털케이블TV쇼에서 세계 최초로 시작했습니다. 갓 시작된 시장이어서 UHD 전용 콘텐츠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선점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간 유료방송업계에서 상용화한 UHD 서비스는 셋톱박스 없이 앱 형태로 볼 수 있는 '셋톱프리' 방식이었습니다. 셋톱프리 방식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서비스가 셋톱박스 방식입니다. 전용 셋톱박스만 갖추면 TV 제조사나 모델에 관계없이 모든 UHD TV에서 방송을 시청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SKB와 KT가 경쟁한 구체적인 내용은 '누가 먼저 셋톱박스 방식의 UHD TV를 상용화하나'였습니다. 포문은 SKB가 먼저 열었습니다. 지난달 25일 'SKB, UHD 셋톱박스 국내 최초 상용화'라는 보도자료를 오전 여덟 시께 뿌린 겁니다.

열 시가 넘어 KT에서도 보도자료가 왔습니다. '올레tv, 세계 최초 UHD TV시대 연다!'는 제목이었죠. 양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KT관계자는 "셋톱박스 방식 UHD TV를 먼저 선보이려고 준비했는데 SKB가 그 소식을 듣고 자료를 먼저 냈다"고 주장했고, SKB 관계자는 "일정에 따라 꾸준히 준비해 온 것인데 무슨 소리냐"며 반박했습니다.

양사 관계자들은 "기자들은 의미없는 경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각사의 자존심이 걸린 것"이라며 자사 내용을 더 많이 써주기를 원했습니다.

이날 상용 시점을 물었더니 양사 모두 9월1일이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KT는 "SKB보다 먼저 준비했고, 그 회사가 전파 인증을 받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에 결코 SKB는 9월1일에 서비스를 내놓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SKB는 26일 셋톱박스의 전파인증을 국립전파연구원으로부터 순조롭게 받았다는 자료를 냈습니다. 이어 1일 상용 서비스 첫 가입자가 나왔다고 보도자료도 냈고요. 그게 바로 1일 오전 받은 메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위에 밝혔듯, KT의 메일이 잇따라 왔고요.

SKB는 "그것 봐라"며 의기양양해하고 있습니다. SKB 관계자는 "오래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온 것이고 결코 경쟁사와는 관계가 없다"며 "보도자료를 가로채기한 것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일정에 착착 맞출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KT 관계자는 "어떤 수를 써서 SKB가 빨리 인증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준비가 KT보다 훨씬 미흡하다"며 "실시간 방송도 없이 '방송'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고 있습니다. SKB는 주문형비디오(VOD) 콘텐츠만 볼 수 있는 반면 KT는 8시간 분량의 실시간 방송도 제공합니다. 하지만 KT 관계자는 "결코 1일에 인증을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대답을 피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의미없다는 반응입니다. 한 기자는 "통신사들이 최초에 목매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아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대역 LTE-A 서비스도 통신 3사가 서비스 출시시기를 놓고 줄다리기를 계속했습니다. 앞서 지난 1월에는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가 네 배 빠른 LTE인 3밴드 LTE-A 개발을 놓고 세계 최초를 다퉜고요.

2012년에는 VoLTE 세계 최초 타이틀을 먼저 달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였습니다. 이쯤되면 거의 '세계최초병(病)' 중증 환자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돕니다.

경쟁이 성장의 동력이라지만 첫 상용화 시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소비자는 좋은 UHD 방송을 보면 만족입니다. 어디서 먼저 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실 있고 장애 없는 UHD 방송을 편하게 시청하면 그만입니다.

며칠간 UHD 최초 보도자료에 시달린 나머지 느긋한 LG유플러스의 코멘트가 오히려 믿음직스럽게 들릴 정도입니다. "UHD TV 준비하고 있습니다. 소비자가 즐길 콘텐츠를 갖추고 제대로 내놓느냐가 중요하지, 최초에만 집착해 경쟁하는 모습은 좀 안타깝네요." SKB-KT 양사에 비해 개발이 지나치게 늦어지고 있기 때문인지, 그 속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만. (끝)

오늘의 신문 - 2024.05.0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