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 이집트에서 활동했던 히파티아(Hypatia) 얘기입니다. 히파티아는 AD350년 무렵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테온 알렉산드리쿠스(c. 335~c. 405)의 딸로 태어납니다. 히파티아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고, 가르치게 됩니다. 후대의 사료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이집트 각지에서 히파티아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히파티아의 수학적 업적은 구체적으로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저작을 보관하고 있었다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훗날 파괴되면서 책들이 잿더미가 됐기 때문입니다. 일부 저작은 히파티아가 죽음을 당하던 시기에 같이 파괴되고 사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편적으로 천문학 계산 및 점성술과 관련된 작업, 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새로운 풀이법과 일,이차 방정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추곡선에 대한 히파티아의 주석 작업도 있었다고 합니다.
히파티아는 (실제로 정말 그랬는지는 의문이지만) 미모도 빼어났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히파티아에게 청혼했고 그때마다 그는 “저는 이미 진리와 결혼 했습니다”며 사양했다고 전해집니다.
문제는 그가 연구했던 수학이 당시에는 철학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입니다. 철학은 신앙과 밀접했던 탓에 자칫 종교적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습니다. 이교적인 신플라톤주의 학파로 분류되는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AD 412년 키릴이라는 인물이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임명되면서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키릴은 ‘이단’에 강경한 탄압책을 폈습니다. 수학을 무기로 삼아 (이교도의 핵심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던 히파티아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AD 415년 키릴의 사주를 받은 일군의 기독교인들은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히파티아를 납치해 마구 때린 뒤 머리카락을 마차에 묶어 카이사리움이라는 교회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옷이 모두 벗겨진 히파티아의 피부는 굴 껍데기(기와조각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로 살점이 발렸습니다. 결국 피투성이가 된 그는 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수학자대회 소식으로 연일 신문지상에 수학 관련 소식이 많이 전해집니다.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수상자 중 최초의 여성 수학자도 한국에 방문했다고 하네요. 문득 고대 세계의 가장 유명했던 여성 수학자의 극적인 삶과 죽음이 떠올라 몇자 적어봤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