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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만 있는 관행, 바꾸고 싶은 금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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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길 증권부 기자)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말할 때 거침이 없습니다. 확신이 있어서겠죠. 뉴욕에서 7년간 회계사로 일하다 펀드매니저로 변신했고, 30년간 월가에서 탁월한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올 초부터 한국의 작은 운용사를 맡아 ‘조용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융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바꾸겠다는 포부이죠. 며칠 전 만났을 때 ‘한국에서만 당연시되는 관행, 꼭 바꾸고 싶은 금융 문화’를 얘기했습니다.

1. 국내 대형 A증권사의 뉴욕사무소는 핵심 지역인 ‘파크 애비뉴’에 자리잡고 있다. 임차료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월가에서 수십 년간 일했지만, 증권사가 그런 비싼 곳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증권사는 ‘갑’이 아니라 ‘을’의 입장이다. 고객을 끊임없이 찾아다녀야 하는데, 임직원들 공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2. 국내 B은행에 몇 년 전 외국인 행장이 취임한 적이 있다. 이 행장은 따로 연락하지 않고 뉴욕 지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자 뉴욕 지점이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본사 비서실에서 왜 사전에 연락을 주지 않았느냐는 거다. ‘의전’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며, 비서실에 강하게 항의했다고 들었다. 외국인 시각에서 보면 매우 부자연스럽다. 고위 임원이든 아니든 각자 할 일을 하는 것 뿐이다. 한국 금융회사의 외국 지점은 고위직 의전에 지나치게 신경쓰는 것 같다.

3. 나는 올 초 사장으로 취임한 뒤 회사 차량을 매각했다. 운전기사도 두지 않고 있다. 직접 차를 몰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외국에선 굴지 기업의 회장 정도가 아니면, CEO라 하더라도 지하철을 타는 게 자연스럽다. 한국에선 임원만 돼도 차량 지원에 운전기사까지 두는 모습을 종종 본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 회계사 눈으로 한국 기업들의 재무자료를 볼 때마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 모든 숫자가 딱딱 들어맞는다. 무슨 얘기냐 하면, 미국에선 웬만한 기업은 100만 달러(약 10억원) 정도 끝자리 숫자는 ‘0,000,000’ 등으로 통일한다. 매출 규모가 큰 은행 같은 경우엔 500만 달러까지 ‘0’으로 처리한다. 수 억건의 회계자료를 1센트까지 맞추는 건,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의 재무제표에선 1원 단위까지 모두 들어맞는 걸로 돼 있다. 엄청나게 많은 자료의 숫자를 1원 단위까지 다 맞췄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신이 작성했거나 회계분식을 했거나.

5. 금융감독 당국의 건물이 너무 크고 화려하다. 외국에선 감독당국 건물은 대체로 허름하고 초라하다. 당국 빌딩의 외관이 멋지면, 그만큼 힘이 세다는 얘기다. 신기하게도 그 나라 금융산업의 발전과, 당국 빌딩 외관은 정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더라.

존 리 대표는 스스로 작은 것부터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내에선 본부장, 팀장 등의 직급을 없애고, 상급자 보고 과정을 단순화했습니다. 제각기 다른 일을 하는데, 팀장 등 중간 단계를 거칠 이유가 없어서지요. 그래서 인턴 사원도 CEO에게 직접 보고한다는군요. 사내 회식도 없앴습니다. 직원들이 일찍 퇴근해 가족과 함께 저녁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랍니다.

시작은 작은 변화이겠지만 큰 반향을 불러오길 기대합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12.21(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