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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 폭격은 천년 전 대학살의 복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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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증권부 기자) 이스라엘이 연일 가자지구를 맹폭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 대립이 1차적인 원인이겠지만 미국이 든든하게 이스라엘의 뒷배를 지켜주는 것으로 봐서는 범 서방과 아랍권의 대결로도 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서방과 아랍권의 지긋지긋한 피의 대립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보통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대학살'을 꼽고는 합니다.

천년 전에 종교적 광신에 빠진 십자군이 당시 관례와 보편적 규범을 무시하고 정복한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한 것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심원한 대립을 잉태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군 분야 연구의 바이블로 꼽히는 스티븐 런시맨 교수의 3권 짜리 ‘십자군의 역사’ 역시 이같은 시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1950년대 출간된 이래 십자군 연구의 출발이자 지존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이 역작(당시 유럽의 주요 사료는 물론 아랍권 사료와 북유럽 사가까지 화려하면서도 생생하게 활용한 심오한 역사연구서이자 문학작품이기도 합니다.)에서도 십자군의 예루살렘 대학살은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과 더불어 가장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런시맨 교수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곽은 전 세계 중세 요새 중 가장 강력한 방어시설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제국 시기 하드리아누스가 성곽을 개수한 이래 비잔티움제국과 우마이야 왕조, 파티마 왕조에서 지속적으로 성곽을 개보수했기 때문입니다.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의 태수인 이프티카르 웃 다왈라의 지휘 하의 아랍과 수단군대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프랑크족(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군로에 있던 우물에 독을 풀고 가축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습니다. 뒤이어 아랍 군대는 예루살렘 내에 거주하던 기독교 주민들을 (정통파던 이단이든 상관없이 죽이는 게 아니라, 당시 관행대로) 성곽 외부로 이주시켰습니다. 유태인들은 이전처럼 예루살렘 시내에 머무는 것이 허용됐습니다.

기독교도를 성밖으로 쫓은 것은 공성전 기간 동안 식량 소모를 줄일 수 있고 기독교도들은 무기를 드는 게 금지돼 군사적으로 도움도 안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었던 점도 고려됐습니다. 하지만 성밖으로 쫓아내긴 했지만 관례대로 종교적 관용은 유지됐고 종교를 이유로 한 학살은 없었습니다.

비록 하킴 칼리프 시대의 기독교 탄압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기독교도의 숫자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정교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는 예루살렘 시내에 수천명(당시 인구대비 적지않은 숫자입니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성전은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벽에 도달한 1099년 6월7일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방어군의 준비가 우월해 공략은 실패했습니다. 식수 부족과 더위로 고전하던 십자군은 십자군 지도자들이 6월12일 감람산에 올라 만난 한 은자가 한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신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예언에 힘을 얻어 다시 공격을 가했지만 공성장비 부족으로 또다시 패배했습니다.

이후 식수 부족은 더해졌고 더위와 이슬람 세력 지원군의 움직임 등으로 십자군 내에선 균열의 움직임까지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을 더욱 강하게 했고 공격을 계속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7월 13~14일 밤에 대대적인 공격이 재개됐고, 시온산과 예루살렘 성곽 북쪽의 동쪽 부분에 대한 십자군의 동시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성곽 북서쪽에는 위장 공격도 병행됐습니다.

아귈레의 레이몽에 따르면 “1만2000명의 보병과 1200~1300명의 기사들이 공격의 주를 이뤘고 이들 십자군과 동행한 수도자들과 여자, 어린이들도 공격에 가세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14일 저녁에 레이몽의 군대가 성밖 해자를 넘어 탑루에 대한 공격을 가했고, 다음날 성곽 북쪽 성루는 고드프레이와 그의 동생인 볼로냐의 유스타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뚫리게 됩니다. 리톨트와 투르네의 길베르 두 명의 플래밍 출신 기사가 로렌지역에서 온 군대의 선봉에 섰고 뒤를 고드프레이가 뒤따랐습니다.

교두보가 마련된 뒤 예루살렘 성문이 열렸고 탕크레드가 이끄는 십자군 주력이 예루살렘 시가로 진입했습니다.

방어막이 무너진 것을 본 무슬림들은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유명한 이슬람 사원으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눕혔던 장소에 건설됐으며 북쪽문 근처 바위에는 무함마드가 19개의 금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과 ‘알 악사 모스크’가 위치한 사원지구를 최후의 요새로 삼기 위해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방어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탕크레드의 십자군이 그들을 덥쳤고, 무슬림들은 서둘러 거액의 몸값을 약속하며 항복했습니다. 알 악사 모스크에서 항복한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탕그레드의 깃발을 걸고 안전을 보장받았습니다.

나머지 다른 도시 거주자들은 이프티카르가 여전히 레이몽과 교전 중이던 도시 남부지역으로 몰려갔습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이프티카르는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다윗의 탑으로 도피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십자군에게 자신과 자신의 호위병들의 안위를 보장한다면 엄청난 양의 보물을 몸값으로 지불하겠다고 레이몽에게 제의했습니다. 레이몽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프티카르는 안전하게 도시를 빠져나가 아스칼론 요새에 있는 무슬림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거액의 몸값을 지불한 이프티카르와 소수의 무슬림들만이 예루살렘에서 생명을 보전한 이슬람 교도였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승리한 십자군은 성공에 도취돼 이성을 잃었습니다.

십자군은 시내의 모든 가옥과 모스크로 쳐들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이 대학살은 오후 내내 그리고 밤새 지속됐고, 심지어 알 악사 모스크의 탕크레드의 깃발조차 이곳에 피해 있던 무슬림들에겐 보호수단이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다른 십자군 부대가 모스크로 들이닥쳐 전원을 몰살했기 때문입니다.

아귈레의 레이몽이 그날 아침 사원 지구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사원으로 가는 길에 쌓인 시체와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무릎까지 찼다고 전해집니다. 십자군은 더 이상 죽일 무슬림을 발견할 수 없을 때까지 살인행위를 계속했습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버하르트 마이어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십자군은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재수없게 그들의 칼이 닿는 곳에 위치한 모든 사람들을 쳐서 쓰러뜨려 버렸다”고 합니다. 오직 로렌지방 출신 군대만이 학살에 비교적 소극적이어서 그나마 “유태인 여인들을 강간하는 것만 주저했을 따름이었다”고 전해집니다.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대학살로 희생된 무슬림과 유태인들의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그들의 대학살이 예루살렘시를 텅 비게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대학살의 여파는 오래갔습니다. 오늘날까지 피가 피를 부르는 원인으로 꼽힙니다. 십자군의 행위에 대해 당대의 기독교인들도 공포를 느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크인들(십자군)을 또 다른 지역 내 정치세력으로 용인해 왔던 많은 무슬림들도 학살 이후엔 “프랑크인들은 몰아내야 할 놈들”이라는 확실한 기준을 마련하게 됐다고 합니다.

피에 굶주린 기독교 광신주의는 다시 이슬람 광신주의를 야기했습니다. 이슬람 세계는 유럽의 야만적 행위에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입었고 후일 일부 현명한 근동지역 라틴 세력들이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며 협력하는 기반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대학살의 기억은 언제나 그 같은 시도를 방해했습니다.

천년 전 시작된 피의 악연이 오늘날도 거의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악연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끝)

오늘의 신문 - 2024.05.1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