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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한민구 국방장관을 "천치"라고 부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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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훈 정치부 기자) 북한이 느닷없이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천치’라고 불렀습니다. 북한의 민방위 부대 격인 노동적위군은 29일 한 장관이 최근 육군 미사일사령부를 방문한 것을 비난하는 담화에서 “(한 장관은) 허세를 부리며 호전적 정체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였다”고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습니다.

담화는 또 “우리는 2006년도에 한민구를 대상으로 북남 장령급 군사회담을 할 때에 벌써 그를 천치 중의 천치로 낙인했다"며 "오늘 그 바보가 괴뢰국방부 장관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도대체 2006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한 장관은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관(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5월17일 열린 제 4차 남북 장성급회담의 우리 측 수석대표였고 북측 김영철 단장과 마주 앉았습니다. 나중에 정찰총국장에 오른 김영철은 ’승냥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성격이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죠.

남북 회담에선 처음에 긴장을 풀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인사를 나누는 게 관계입니다. 북측 김영철은 “농사철인데 남쪽은 기후가 더 따뜻하니 농민들이 더 부지런히 일하고 있겠다”고 인사했습니다. 한 장관은 “모내기를 시작했다”며 “요즘 농촌 인구가 줄어 들어 농촌 총각들이 몽골, 베트남, 필리핀 처녀와 많이 결혼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북측 김영철은 이 말을 듣고 정색을 하며 “우리는 하나의 혈통을 중시해 왔는데 민족의 단일성이 사라질까 걱정이다”고 했고, 한 장관은 웃으며 “한강물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리는 수준이다. 주류(한국인)가 있기 때문에 다같이 어울려 살면 큰 문제는 없다”고 했습니다.

김영철은 "우리는 예로부터 삼천리 금수강산이다. 잉크 한 방울도 떨어뜨려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혔습니다. 한 장관이 “우리 역사를 보면 동이족이었는데, 주변의 말갈, 여진, 만주족과 있으면서도 정체성을 지켜왔다”고 받아쳤지만 김영철도 “그 얘기도 맞지만 고조선에서부터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단일 민족으로 이어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회담장이 냉랭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는 게 당시 보도 내용입니다. 회담을 앞두고 기싸움을 벌이느라 때아닌 ‘혈통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북측이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다문화사회’를 이해하는 게 애초에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 장관에 대한 비난은 이때 일을 트집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한 장관은 ‘지장(智將)’이자 ‘덕장(智將)’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최근에는 “북한이 도발을 강행하면 체제의 생존을 각오해야 한다”, “명령만 내리면 적의 어떠한 표적도 타격할 수 있어야 한다” 등 강경 발언을 이어왔습니다. 북한이 최근 잇달아 미사일 발사를 하는 등 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어 군의 수장으로서 사기를 높히기 위한 발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침 이날 한 장관은 취임 후 처음으로 기자들과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지장‘, ’덕장‘의 풍모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최근 일반전초(GOP) 총기난사 사건, 관심사병 자살사건 등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냐는 질문이 나오자 한 장관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과거 중세 유럽의 술집엔 (여성들이 계셔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동물, 창녀, 군인 출입금지란 팻말이 쓰여 있었다. 용병이 득세했던 시기에 시민군의 개념이 잡혀 있지 않은 때였다. 반면 현대의 문민 군대는 국민에 안보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다. 국민의 불안감이 해소되도록 최상의 방어태세를 유지하면서 자녀들을 군에 보낸 부모들이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 육사 전쟁사 교관을 지낸 사람다운 답변이었습니다.

한 장관은 또 “우리 군의 최우선 문제는 간부들이 병사의 생활을 겪지 않아 전혀 이해를 못한다는 데 있다”고도 했습니다. 병장 만기제대를 한 기자도 이같은 문제 의식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병 생활을 하다 부사관, 장교로 진급할 수 있는 모병제 군대와 병사와 초·중급 장교간의 칸막이가 쳐 있는 한국군(징병제)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한 장관은 병사들을 직접 통솔하는 초급 장교들이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만드는지가 관건이라고 했습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한 장관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 처럼 ’천치’는 커녕 ‘지장’이자 ‘덕장’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요즘 안보가 불안하고 국민들의 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 장관이 64만 대군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주목됩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0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