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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행장님 기사는 제발 쓰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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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 금융부 기자) “우리 행장님 기사는 되도록 안쓰면 안될까요. 행장님이 걱정되서 그럽니다.”

지난 23일 이상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나은행 모 팀장의 전화였습니다. 김종준 하나은행장에 관한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보통은 행장 사진은 무조건 크게, 기사는 무조건 많이 실어 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말입니다. 행장의 이미지 홍보를 위해서지요.

그런데 이날은 행장의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날 아침 하나은행은 언론사 기사 게재를 위한 보도자료까지 낸 상황이었습니다. 내용은 김 행장이 이날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하나은행 하반기 영업전략회의’에서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조기 합병 필요성을 밝히고 나섰다는 것이었습니다. 김 행장이 지금까지 대외적으로 두 은행의 합병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가 되는 내용이었지요. 그런데도 하나은행 측은 “기사를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오니 이상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하나은행의 설명을 들어 보니 이해가 되긴 했습니다. 하나-외환은행의 조기합병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김 행장의 발언을 널리 알릴 필요는 있지만, 문제는 김 행장이 금융감독원 제재를 앞두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감독당국은 KT의 자회사인 KT ENS에 대한 부실 대출 등과 관련해 하나은행 경영진에게 책임을 물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감독당국 징계를 앞두고 행장님이 너무 나선다는 이미지를 주면 징계 결과에 악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김 행장의 합병 관련 발언을 보도자료로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감독당국에 미칠 수 있는 영향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감독당국이 객관적인 잘잘못을 따지는데 집중할 뿐, ‘나선다’는 사실 때문에 괘씸죄를 적용하진 않겠지요. 하지만 징계를 받는 사람으로서는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합니다.

이같은 현상은 비단 하나은행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은행, 우리은행 등 기관과 경영진에 대한 징계가 예상되는 곳 모두 최고경영자(CEO)의 사소한 발언이라도 감독당국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까봐 전전긍긍하지요.

그렇다면 한국경제신문은 김 행장의 합병 발언 관련 기사를 썼을까요, 안썼을까요? 답은 ‘썼다’입니다. 그래서 취재원들은 기자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로 만나야 한다고도 말하지요. 이번 기사가 감독당국의 징계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0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