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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증권사 상징이었던 시세판, 이젠 여의도엔 하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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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증권부 기자) 증권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아마도 많은 분이 증권사 객장의 대형 전광 시세판을 연상하실 듯 합니다. 주가가 급등하거나 급락한 날 신문지면이나 방송화면에서 붉은색, 혹은 녹색으로 도배된 시세판을 보셨던 기억은 다들 있을 것입니다.

국내에서 증시 시세판을 가장 먼저 도입한 것은 대신증권입니다. 1979년 업계 최초로 전광 시세판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증권협회 방송요원이 거래소에서 결정된 시세를 유선전화로 불러주면 사람이 일일이 분필로 칠판에 가격을 적었다고 합니다. 잘 믿기지 않는 얘기이긴 한데요.

하지만 한때 첨단기술의 상징과도 같았던 전광 시세판도 요즘엔 찾아볼 수 있는 증권사 객장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의 활성화로 젊은 투자자들은 아예 객장을 찾지 않기에 시세판 수요가 크게 줄었기 때문입니다. 증권사 입장에서도 비용절감을 이유로 기존 시세판을 없애고, 새 매장에는 아예 설치하지 않는 게 일반화됐습니다.

현재 증권거래 1번지인 여의도에서 ‘대형 전광 시세판’을 운영하는 것은 시세판을 처음 도입했던 대신증권 본점 1곳 뿐입니다. 대신증권으로선 한때 업계를 대표했던 옛 영광의 상징 같은 의미도 있다고 하는데요.

대신증권으로선 시세판을 계속 운영하느냐 여부와 상관없는 시세판 관련 고민이 있다고 합니다. 전광 시세판의 기본틀은 1980~1990년대와 달라진 것은 없는데 2000년대 들어서 주가가 너무 올라서 시세판에 가격을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종목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주당 100만원이 훌쩍 넘는 삼성전자 등 ‘황제주’들이 대표적입니다. 마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에서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 선수가 10.00만점을 만점을 받고도 전광판 숫자가 부족해서 1.00으로 점수가 공개된 것과 마찬가지랍니다.

대신증권으로선 시세판의 단위를 하나 늘리려면 전광판 전체를 ‘갈아엎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후문이고요.

개인적으로는 증권사 객장의 전광판을 바라보고, 전광판 앞에 앉아계신 나이 지긋하신 투자자들을 볼 때마다 과거의 익숙함 때문에 신기술 도입이 지체되는 현상이 떠오르곤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쇄기 도입과 관련된 이탈리아의 사례입니다. 서양에서 인쇄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1450년경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됐습니다. 이후 책에 대한 수요와 함께 인쇄술은 마인츠와 라인강 주변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됐고요. 1459년 스트라스부르, 1466년 쾰른, 1468년 바젤과 아우구스부르크, 1473년 파리에 인쇄기가 도입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대의 문화 선진국 이탈리아에선 인쇄기의 진출이 더뎠다네요. 이탈리아 사회는 글쓰기가 일상화돼 있었고, 오늘날의 인간 복사기 격인 필경사들이 많이 있었던 탓에 인쇄술의 도입이 늦었던 것입니다.

실제 독일 지역에선 인쇄기가 한참 보급되던 1460년대에 코지모 데 메디치로부터 200권의 책을 만들 것을 주문받은 이탈리아 필경사 베스파니아노 다 비스티치는 45명의 ‘시다’필경사를 고용해 제작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진짜 인쇄기와 경쟁에서 인간 복사기가 밀려나게 되고, 마침내 1478년에는 비스티치도 파산의 ‘쓴맛’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와 비슷한 이유로 조선시대 인쇄문화가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영화 ‘음란서생’에 등장하는 필경문화의 발달로 인쇄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같은 논리로 활이 매우 효율적이어서 총의 도입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증권사 객장의 전광 시세판이 인쇄기 도입기의 필경사들 같은 존재일지, 아니면 제가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은 것일지 문득 궁금해지는 하루입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0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