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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강세와 ‘그레셤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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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증권부 기자) 원·달러 환율이 다시 1020원선에 바짝 붙었습니다. 원화가치 강세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수출 의존도가 큰 한국 경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우려섞인 시선이 적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의 경제 수준이 제대로 평가받고, 제값을 받는다고 볼 수 있어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적지 않습니다.

실제 주식시장에선 원화강세 시기에 코스피지수가 상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최근 2030 언저리까지 부쩍 올라온 코스피지수를 봐도 이같은 현상이 반복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최근의 원화강세는 외국의 기축통화와의 상대적 비교를 통한 것이지요. 하지만 돈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은 좀 더 시야를 넓게 보면 매우 드문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지속적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으니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레셤의 법칙’입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라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진 ‘법칙’인데요. 요즘 젊은 세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구축’이라는 단어는 “진지를 구축(構築)한다”식으로 주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세력 따위를 몰아서 쫓아냄’이란 뜻을 지닌 ‘구축(驅逐)’이라는 낱말은 이제 사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합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취해진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QE)’ 처방도 따지고 보면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 빚 부담을 줄이는 것이니 어찌 보면 오늘날도 악화가 양화를 계속 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 저명한 경제사학자 갤브레이스는 “역사상 단 한 번도 도전받지 않은 경제법칙”으로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쫓아버린다는 소위 ‘그레셤의 법칙’을 꼽기도 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금속화폐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됐다고 합니다. 금속 화폐는 처음에는 오늘날 금괴와 비슷한 막대(bar)형이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국부론』에서 고대 로마시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고대 로마인들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시대까지 주화를 가지지 않았고 필요한 것을 구매하기 위해선 각인되지 않은 구리덩어리를 썼다”는 ‘전설’을 전했습니다.

문제는 매번 거래할 때마다 무게와 금, 은의 순도를 확인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막대 표면에 무게와 순도를 확인하는 인장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인장은 위조하기 쉬웠고, 막대의 일부를 잘라내도 표시가 나지 않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주화(금속화폐)였습니다. 최초의 금화와 은화는 BC 7세기 소아시아의 리디아인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리디아인은 금화와 은화에 사자머리 문양을 새겼습니다. 금속화폐에 문양을 찍는 방법은 이웃 나라들로 퍼져 나가서 아이기나는 거북, 코린트는 날개 달린 말, 아테네는 부엉이를 화폐에 등장시켰다고 전해집니다. 페르시아 화폐에는 사자와 황소, 활을 쏘는 궁사 등이 배치됐고요. 중국 한나라에선 오수전(五銖錢)을 발행할 때 동전의 양면에 윤곽을 넣고 주조했는데 동전을 갈아서 동(銅) 가루를 얻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안전장치를 한 금속화폐도 무게와 순도 조작의 위험에서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화폐를 만드는 국가부터 이 같은 문제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BC 6세기경 아테네를 이끌었던 솔론은 화폐를 만들면서 이익을 챙기는 ‘주조차익(시뇨리지)’ 관례를 최초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은 1달란트(talent)는 60미나(minae)였고, 1미나는 100드라크마(drachmae)였죠. 은 1달란트는 6000드라크마 가치를 가지는 게 원칙이었지만 솔론은 1달란트로 6300드라크마를 주조했습니다. 주화 제작 첫 발부터 은화의 표면가치는 실질가치에 못 미쳤던 것입니다.

로마시대에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3세기 이후 로마의 영토 확장이 한계에 이르면서 정복을 통한 전리품 유입이 크게 줄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지출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대규모 공사와 왕실의 사치를 위한 자금 수요는 끝이 없었고,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들은 많은 재물을 계속 풀어야 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이 택한 방법은 재원 확보를 위해 은화 속의 은 함량을 줄여나간 것이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금화(아우레우스)와 은화(데나리우스), 동화(세스테리우스) 등 3개 금속에 바탕을 둔 화폐 체제를 갖췄지만 주화의 기준은 은화인 데나리우스였습니다.

문제는 주화의 액면 가치는 그대로 둔 채 크기와 함량을 줄이는 ‘장난’을 쳐서 동일 양의 금속으로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이 방법은 돈이 필요할 때 세금을 올리는 것보다 시민들의 저항도 훨씬 적었습니다. 이미 1세기 중반에 플리니우스는 해마다 2500만 데나리우스가 넘는 돈이 중국, 인도, 아라비아의 사치품을 사는 데 쓰였다고 기술했고 실제로 로마의 화폐는 인도에서 흔히 발견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 화폐가치 하락이 꾸준히 발생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아예 도금된 화폐를 만들어 재원을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로마 데나리우스 은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해외에선 은 함량이 높은 특정 은화만 요구하게 됐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은화를 시장에 풀지 않고 품안에 모셨습니다. 시장에 유통되는 것은 모두 순도가 낮은 불량 화폐 뿐이었습니다.

54년 은 함량이 100%에 가까웠던 로마의 은화는 68년 은 함량이 90%로 줄었고, 211년엔 50%로 떨어졌습니다. 260년 갈리에누스 황제가 집권했을 때 은 함량은 60%였지만 불과 8년간의 집권이 끝난 뒤인 268년에는 원래 중량의 4%밖에 안 되는 은이 섞였습니다.

결국 로마제국 말기에 가면 데나리우스를 대체하는 라디에이트가 도입되지만 라디에이트는 액면가는 데나리우스의 두 배이면서도 은화에 함유된 은은 2%에 불과하고 98%는 동이었다고 합니다. 29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중량 100% 은화를 새로 주조하며 화폐가치 안정을 꾀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화폐가치 하락의 법칙은 중세시대에도 계속 관철됐습니다. 로마제국 멸망 후 도시가 활기를 잃고, 교역이 위축되면서 화폐 자체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사례까지 나왔습니다. 브리튼 섬에선 로마군이 물러난 뒤 화폐 사용이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전면 중단됐습니다. 유럽 전역을 아우르던 로마라는 권력이 사라진 뒤 화폐 발행과 유통을 강제할 주체가 없어진 탓이었습니다.

각 지역별 봉건 제후들의 권력이 커지면서 화폐 주조권은 더욱 분열됐고, 화폐가치는 계속 급락했습니다. 지방의 봉건영주들이 주조한 잡다한 화폐들이 뒤섞여 유통됐습니다. 중세시대가 ‘위조의 시대’였던 만큼 위조화폐도 흔했습니다.

화폐의 공급 뿐 아니라 수요도 위축됐습니다. 농민들은 자급자족 경제생활을 했고, 장원제 하에서 농지 사용료는 화폐가 아니라 수확물과 노동 같은 현물로 지급됐습니다. 화폐는 영주들이 사치품을 사는 용도 정도로만 살아남았습니다. 화폐를 거래할 일이 사라지면서 금화는 시장에서 유통되기는 커녕 목걸이나 기념품으로 사용됐습니다.

얼마 유통되지 않던 화폐마저 가치 하락과 재주조가 반복됐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반인들의 위조(counterfeit)와 테두리 깎기(clipping)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가죽가방 안에 동전을 넣고 흔들어 떨어지는 가루를 모으는 ‘땀내기(sweating)’방법도 있었습니다. 은행업자나 금세공업자들은 금은의 순도가 높은 양화는 자신이 보유하고 순도가 떨어지는 악화만 거래에 사용했습니다. 화폐 훼손에 대처해 나타난 궁극적 처방은 1663년 영국에서 처음 채택된 주화 둘레에 오돌토돌한 톱니 모양을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후대 인물인 엘리자베스1세 때 왕실 재정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1533~1603)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고 압축적으로 표현했고요.

각종 ‘범죄행위’ 탓에 화폐가치가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면, 일차적으론 강한 처벌책과 협박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1124년 영국의 헨리1세는 200여명의 화폐제조 장인을 불러 모은 뒤 100여명의 오른손을 잘라버렸다는 얘기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가장 널리 쓰인 방법은 화폐가치를 경쟁적으로 더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왕들은 기존 화폐를 모아 중량과 순도가 다른 새 화폐로 찍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폐 유통량은 과거에 비해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자들의 주조차익 욕구는 여전했습니다. 3~5년 간격으로 기존 주화를 회수한 다음 가치가 낮은 새 디자인의 주화로 대체하곤 했다곤 합니다.

특히 14세기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장2세는 영국과 전쟁에서 생포된 뒤 당시 프랑스 영토 절반에 해당하는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재위 첫해에만 18번, 그 뒤 10년 동안 70번이나 화폐를 개조했습니다. 1360년 몸값으로 내기 위해 3.87g 무게로 발행한 새 화폐 ‘프랑(franc)’은 이후 프랑스 화폐단위 프랑의 기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화폐가치 하락은 범유럽적 현상이었지만 지역별로 약간씩 수준차가 있기는 했답니다. P. 스퍼퍼드의 계산에 따르면 1300~1500년 유럽의 화폐가치는 잉글랜드가 1.5%, 아라곤과 베네치아가 1.9%, 보헤미아 2.5%, 한자동맹 3.9%, 피렌체 3%, 로마 2.8%, 프랑스 3.9%, 오스트리아 5%, 플랑드르 6.1%, 쾰른 16.8%, 카스티야 65% 수준으로 손실을 경험했습니다.

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주화가 계속 찍힌 원인으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가 화폐발행을 독점한 이후 군주들은 화폐에 자신의 모습을 새겨서 국민에게 지배자의 위상을 과시하거나, 화폐발행에 따른 화폐주조차익을 획득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고 꼬집기도 합니다.

게다가 재주조에 따른 비용을 왕실이 부담하지 않은 탓에 혹 순도는 좋아졌을지 몰라도 화폐의 중량은 지속적으로 줄었습니다. 반복적인 재주조로 영국에선 은화 1파운드가 120페니로 만들어지다가 15세기가 되면 240페니로 주조됐습니다. 중량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화폐를 쪼개고 자르는 행위도 오랫동안 살아남았습니다. 주화를 8조각으로 절단해 사용하는 관습에서 ‘조각(piece)‘을 의미하는 페소라는 통화단위가 만들어졌습니다. 해적들은 8분의1조각이란 표현으로 페소를 지칭했고, 영어에서 ’2조각(two bits)’이라는 용어도 25센트를 의미했습니다.

유럽 사회가 이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의 부상 덕이었다고 합니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금화를 주조할 만한 양이 축적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악화 생산에 브레이크를 건 것입니다.

13세기 중엽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 등에서는 자체적으로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에 따르면 1340년경에 피렌체 주조소는 연간 35만~40만 플로린 어치의 금화를 찍어댔다네요. 피렌체에서 주조한 ‘피렌체 금화(피오리노 도로)’인 플로린화는 금화 하나당 순금 54그레인(gr)을 함유했고, 유럽 여러 황제와 왕들에 의해 모방됐습니다. 네덜란드와 헝가리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최종승자는 상업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 주조한 두카트 금화였습니다. 두카트화는 무게와 순도가 정확하게 유지됐기 때문에 국제결제를 대표하는 통화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프랑스 장2세의 일부 몸값과 잉글랜드 리처드2세의 부인이었던 프랑스 이사벨의 지참금, 키프로스 자크1세의 몸값, 곤트의 존이 영국 왕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대가가 모두 두카트화로 지불됐습니다.

양화(良貨)가 시장의 신뢰를 양분삼아 유럽경제의 분위기를 바꿔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즘도 환율 문제가 불거지면 정부의 개입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정부(중앙은행)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시장의 신뢰와 예측이 크게 요동치기도 하고요. 돈의 가치와 관련된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봅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17(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