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연 정치부 기자) “대표는 위임된 권한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국민과 당원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10일 오전 9시 30분.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딱’ 이 한마디를 남기고, 대표실로 들어갔습니다. 정치적 명운을 걸고 지킬려고 했던 ‘기초선거 무공천’원칙이 끝내 당원및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안 대표는 만감이 교차한 표정이었습니다. 당원투표와 국민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공천 해야 한다’는 의견(53.44%)이 ‘공천 하지 말아야 한다’(46.56%) 는 쪽을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말진기자(국회 막내기자)들의 ‘뻗치기’(취재 상대를 한없이 기다림을 뜻하는 용어)는 시작됐습니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요. 당대표실을 찾았던 최재천 전략홍보본부장, 김관영 비서실장, 민병두 의원이 방에서 나왔습니다. ‘아 이제 입장정리는 끝났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기자들은 두 공동대표의 기자회견을 기대했습니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으니 공동대표가 입장표명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웬걸. 대표입장 발표는 미뤄졌다는 소식만 들려왔습니다. 김한길 공동대표가 11시 30분께 점심약속을 위해 자리를 떴습니다. 김 대표는 지도부 입장발표가 있냐는 질문에 “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응답했습니다. 이 때부터 장고(長考)에 들어간 안 대표와 대표실 앞 복도에서 진을 친 12명의 기자들간 대치상황이 벌어집니다.
안 대표는 9시30분 당대표실에 들어간 후 6시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화장실도 한번 가지 않았습니다. 12시40분께 ‘본도시락’이 배달됐을 뿐입니다.
‘그래도 화장실은 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기자들은 자리도 뜨지 못하고 노트북 배터리가 다하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당대표실 앞에는 김밥, 음료수, 과자 등 끼니를 떼우지 못한 기자들의 흔적이 굴러다녔습니다.
안 대표의 칩거가 길어질수록 기자들 사이에선 “또 중대 발표를 결심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8일 의원총회에서 안 대표는 “정치 생명을 걸고 이번 국면을 돌파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무공천을 뒤집는 결과가 나오면) 백의종군할 생각도 있다”며 대표직 사퇴로 배수진을 칠려고 하자 김 대표가 적극 만류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왔습니다.
‘정치 생명’까지 걸었던 기초선거 무공천 결정을 철회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니, 대표직 내려놓기, 탈당, 더 나아가 정계은퇴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등 기자들간에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습니다.
당대표실에 머무르는 동안 안 대표는 방 안에 틀어박혀 김한길 대표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참고로 당대표실에서 안 대표와 김한길 대표는 ‘각방’을 쓰고 있습니다. 이윤석 대변인은 “(안 대표가) 안에서 혼자 무슨 일을 하는 지 알 수 없다”며 “무언가 중요한 발표를 할 예정인 것만 알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칩거가 시작된 지 6시간30분이 지난 오후4시. 드디어 당 대표실 문이 열렸습니다. 6시간이 넘는 ‘셀프감금’에 안 대표도 기자들 못지 않게 괴로운 시간 이었나 봅니다. 착잡한 표정의 얼굴은 아침보다 더 까칠해 보였습니다.
안 대표는 “과정이나 이유야 어떠했든 저희들 마저 약속을 지키지 못해 국민들게 사과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제 기억으론 정계에 뛰어든 후 세 번째 사과입니다.
짧은 입장발표문에 기초공천 폐해에 대한 부분이 상당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원칙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괴로운가 봅니다.그는 마지막으로 “풀이 무성하고 밟히지 않아서 가야할 이유가 더 많은 그 길을 선택했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남들이 가지 않아 험하고 힘든 길을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인 안철수'가 맞딱뜨려야할 수 많은 역경을 암시하는 듯 하네요.
하지만,앞으로는 마감을 해야 하는 기자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칩거’는 자제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