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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기금운영본부에는 본부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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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이사장과 본부장의 어정쩡한 '동거'

(박동휘 증권부 기자) 국민연금관리공단 홈페이지에 접속한 후 ‘공단 소개’로 들어가면 430조원의 자금을 굴리는 기금운용본부 소개 페이지가 열립니다. 4일까지만 해도 기금본부 조직도는 ‘이사장’을 정점으로 밑에 7개 실과 리스크관리센터, 뉴욕 런던 사무소가 속한 것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좀 이상했습니다. 기금본부의 수장인 기금운용본부장(기금이사)은 이 조직도 상에 아예 존재조차 없던 겁니다.

이 얘기를 기금본부 직원에 전달했습니다.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이 말도 틀린 것은 아닌 게 기금본부 페이지가 아니라 공단 페이지에 나와 있는 조직도를 열어 보면 ‘이사장-기금이사-기금운용본부’로 이어지는 서열 관계가 제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기자의 제보 덕분인 지 아닌 지는 알 수 없으나 다행히 5일 기금본부 페이지에 나와 있는 조직도의 최정점은 ‘이사장’에서 ‘기금운용본부’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좀 이상합니다. 기금운용본부의 조직도를 그린 것이라면 당연히 정점에 있는 칸에 기금이사 또는 본부장이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사장이라고 돼 있던 것을 본부장으로 바꾸는 게 겸연쩍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지금 게시돼 있는 조직도는 ‘동어반복’이라는 촌극을 빚고 말았습니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이번 해프닝은 국민연금 내 이사장과 기금운용본부장 간의 어정쩡한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전일 최광 이사장이 아흐마드 알사예드 카타르투자청(QIA) 대표를 영접한 일도 삐딱하게 보자면 뒷말이 나올 만한 일입니다. 의전상으로 보면 CEO(최고경영책임자)인 최 이사장이 만나는 것이 맞습니다. QIA에서도 CIO가 아니라 대표가 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QIA가 카타르 국부펀드로서 해외 투자와 관련해 협력을 구하기 위해 국민연금을 방문한 것이라면 기금운용을 책임지고 있는 홍완선 본부장을 만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실리보다는 의전이 먼저였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전임 전광우 이사장-이찬우 본부장 체제에서도 논란이 됐던 일입니다. 전 이사장이 워낙 해외에 발이 넓어서였겠지만 2012년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을 비롯해 빌 그로스 핌코 설립자, 조지 로버츠 KKR 회장 등 월가의 막강한 인물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하버드 강연을 하러 간 김에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미국 경제 현황을 들어보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자본 시장 업계에선 “그걸 왜 이사장이 하느냐”는 의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사장과 본부장의 이런 어정쩡한 관계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이사장은 기초연금 논란을 비롯해 연금 급여의 결정 및 지급 등에 힘쓰고, 430조원 기금의 운용은 본부장에 맡긴다는 것이 이상론입니다. 국민연금법 제31조에 ‘기금이사’에 관한 항목이 별도로 마련돼 있는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입니다. 31조에 따르면 ‘국민연금기금(이하 “국민연금기금”이라 한다)의 관리·운용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이사(이하 “기금이사”라 한다)는 경영·경제 및 기금 운용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중에서 선임하여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상이 통하지 않는 법입니다. 공단 조직도 내에서도 봤듯이 본부장은 이사장의 직속 부하입니다. 선임도 이사장이 위원장으로 있는 기금이사추천위원회에서 합니다. 보통 여러 명의 후보들 가운데 2명을 추천하는데 이 때는 민간위원들의 영향력이 작용하지만 마지막 2명의 후보 중에서 한 명을 간택할 때는 이사장의 의중이 반영된다는 것은 알만한 분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결국 본부장은 이사장이 선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본부장은 기금운용의 세세한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줄기의 투자 등에 대해선 이사장에게 보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특히 최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해외 사무소 확대 등 조직 개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연금 안팎에선 이번 프로젝트가 최광 이사장의 주도 하에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홍완선 본부장도 취지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니셔티브를 이사장이 쥐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사장의 이같은 행보는 정부의 공공기관 평가방식과도 관련 있습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공공기관이어서 기획재정부가 예산권을 쥐고 있습니다. 인력 충원을 하는 등 지출을 늘리려면 매년 기재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기재부가 쥐고 있는 칼자루 가운데 특히 위력을 발휘하는 부분은 공공기관장 평가입니다. 경영 성과가 기관장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연금 이사장으로선 경영 성과라는 게 결국 기금운용본부의 수익률입니다. 이러니 기금운용 방식과 결과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국민연금의 현 시스템은 나름대로 장점도 갖고 있습니다. 이사장과 본부장이 430조원의 기금을 운용하는데 있어 서로 돕고, 때론 견제하면서 균형을 찾아갈 수 있어서입니다. 하지만 비효율적인 면에 대해서도 지적이 많습니다. 국민연금 전임 CIO 한 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차라리 이사장을 금융 지식이 해박한 전문가로 선발해 기금 운용에 관한 책임을 맡기는 게 낫다”고 말이죠. 고민해 볼 만한 지적입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9.28(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