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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그룹이 화장품을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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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정 증권부 기자) 지난해 재계의 가장 쇼킹한 사건은 단연 동양사태였습니다. 재계 순위 38위였던 동양그룹은 부실 계열사 5곳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발행해 투자자 4만명에게 1조원의 피해를 입히고 주요 계열사들이 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며 결국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동양그룹의 주력업종은 시멘트와 금융이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건설경기 침체에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죠. 그룹에선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렸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화장품 사업입니다. 사실 동양그룹이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작년 동양에서 만든 화장품을 선물 받고서야 알았으니까요.

동양그룹의 화장품 사업은 김철 전 동양네트웍스 사장(39)이 주도해왔습니다. 짧은 헤어스타일에 찢어진 청바지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출근하기도 했던 김 전 사장은 계열사 인수합병(M&A)에 깊이 관여해 투자은행(IB) 업계에선 일찌감치 ‘베일에 쌓인 그룹 막후실세’로 소문났던 인물입니다.

김 전 사장은 동양그룹의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 사업을 하던 미러스 대표로 있으면서 2011년 강원도 강릉 금진지역의 온천 개발업체 금진생명과학(현 동양생명과학)을 현지 사업가인 김정득 씨로부터 인수했습니다. 이후 김 전 사장은 김정득 씨를 동양그룹에 끌어들였고 김 씨는 ㈜동양 건설부문 겸 동양시멘트이엔씨 대표까지 맡게 됩니다.

이후 미러스는 현재현 회장의 장남 현승담 씨가 대표로 오르게 되는 동양네트웍스와 합병합니다. 그리고 동양네트웍스는 김정득 씨로부터 동양생명과학 지분을 추가로 사들이죠. 동양그룹이 연 32억원 적자를 내는 동양생명과학 인수에 쓴 돈은 모두 76억원에 달합니다.

이렇게 동양그룹에 편입된 동양생명과학은 금진지역 온천수로 화장품을 만들었습니다. ‘크레모랩’이란 브랜드로 CJ올리브영 등 드러그스토어에서 꽤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장품 사업을 주도하던 김 전 사장과 동양에 화장품 사업을 매각한 김정득 씨는 동양사태 이후 불운을 맞게 됩니다. 김 전 사장은 대리점 등으로부터 10억원 상당을 수수하고 법인 계좌에서 3억원을 인출해 사적으로 사용하는 등 1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 기소됐구요. 김정득 씨는 비자금 조성 혐의를 받아오다 지난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동양그룹의 화장품 사업에 대한 이 같은 스토리를 알다 보니 1년 전에 선물받은 ‘크레모랩’을 차마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온천수가 정말 맞기는 한지, 투자자를 속이듯이 소비자를 속인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크레모랩’을 화장대에 고이 모셔둔 채 다른 브랜드의 크림을 두 번이나 새로 사서 써왔는데요. 얼마 전 화장품 사러 갈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크레모랩’ 크림을 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요? 예상을 깨고 화장품의 질이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그 순간 10여년 전 읽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트러스트(Trust)’가 생각나더군요. 후쿠야마 교수는 트러스트, 즉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사회적 자본으로 해석했습니다. 한마디로, 신뢰가 없으면 사회적 비용이 더 든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당시엔 신선한 개념으로 주목받았었지만 10여년이 흐른 지금, 신뢰는 기업 생존 나아가 국가 경쟁력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크레모랩’을 파는 동양생명과학은 신뢰를 잃은 동양이란 회사명을 떼는 것이 향후 판매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얼굴을 만져 보니 매끌매끌한 게 ‘크레모랩’에 대해 만족감이 드네요. 참고로 저는 동양 화장품사업과 티끌 만큼의 관계도 없음을 밝힙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18(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