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그룹의 주력업종은 시멘트와 금융이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건설경기 침체에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죠. 그룹에선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렸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화장품 사업입니다. 사실 동양그룹이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작년 동양에서 만든 화장품을 선물 받고서야 알았으니까요.
동양그룹의 화장품 사업은 김철 전 동양네트웍스 사장(39)이 주도해왔습니다. 짧은 헤어스타일에 찢어진 청바지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출근하기도 했던 김 전 사장은 계열사 인수합병(M&A)에 깊이 관여해 투자은행(IB) 업계에선 일찌감치 ‘베일에 쌓인 그룹 막후실세’로 소문났던 인물입니다.
김 전 사장은 동양그룹의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 사업을 하던 미러스 대표로 있으면서 2011년 강원도 강릉 금진지역의 온천 개발업체 금진생명과학(현 동양생명과학)을 현지 사업가인 김정득 씨로부터 인수했습니다. 이후 김 전 사장은 김정득 씨를 동양그룹에 끌어들였고 김 씨는 ㈜동양 건설부문 겸 동양시멘트이엔씨 대표까지 맡게 됩니다.
이후 미러스는 현재현 회장의 장남 현승담 씨가 대표로 오르게 되는 동양네트웍스와 합병합니다. 그리고 동양네트웍스는 김정득 씨로부터 동양생명과학 지분을 추가로 사들이죠. 동양그룹이 연 32억원 적자를 내는 동양생명과학 인수에 쓴 돈은 모두 76억원에 달합니다.
이렇게 동양그룹에 편입된 동양생명과학은 금진지역 온천수로 화장품을 만들었습니다. ‘크레모랩’이란 브랜드로 CJ올리브영 등 드러그스토어에서 꽤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장품 사업을 주도하던 김 전 사장과 동양에 화장품 사업을 매각한 김정득 씨는 동양사태 이후 불운을 맞게 됩니다. 김 전 사장은 대리점 등으로부터 10억원 상당을 수수하고 법인 계좌에서 3억원을 인출해 사적으로 사용하는 등 1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 기소됐구요. 김정득 씨는 비자금 조성 혐의를 받아오다 지난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동양그룹의 화장품 사업에 대한 이 같은 스토리를 알다 보니 1년 전에 선물받은 ‘크레모랩’을 차마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온천수가 정말 맞기는 한지, 투자자를 속이듯이 소비자를 속인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크레모랩’을 화장대에 고이 모셔둔 채 다른 브랜드의 크림을 두 번이나 새로 사서 써왔는데요. 얼마 전 화장품 사러 갈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크레모랩’ 크림을 개시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요? 예상을 깨고 화장품의 질이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그 순간 10여년 전 읽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트러스트(Trust)’가 생각나더군요. 후쿠야마 교수는 트러스트, 즉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사회적 자본으로 해석했습니다. 한마디로, 신뢰가 없으면 사회적 비용이 더 든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당시엔 신선한 개념으로 주목받았었지만 10여년이 흐른 지금, 신뢰는 기업 생존 나아가 국가 경쟁력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크레모랩’을 파는 동양생명과학은 신뢰를 잃은 동양이란 회사명을 떼는 것이 향후 판매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얼굴을 만져 보니 매끌매끌한 게 ‘크레모랩’에 대해 만족감이 드네요. 참고로 저는 동양 화장품사업과 티끌 만큼의 관계도 없음을 밝힙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