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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占)이 지배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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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 증권부 기자)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연예인 출신 사업가 A대표와 식사 자리에 동석한 일이 있습니다. 20대 초반에 TV 스크린에 등장,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다는 평을 들으며 꽤나 인기를 끌었던 분입니다. 필자는 ‘객(客)’으로 있던 자리였던 지라 주로 대화는 A대표와 그의 지인이 주로 나눴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날 대화의 주제는 ‘점(占)’이었습니다.

A 대표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이 꽤 많아 보였습니다. 하고 있는 사업도 나쁘진 않았지만 좀 더 확장이 필요했고,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학업에 대해서도 새롭게 눈을 뜨고 있는 듯 했습니다. “B씨(유명 텔런트)가 소개해 준 점집에 갔더니 박사 학위에 도전하면 무조건 된다네. 그리고 앞으로 해외에서 사업을 하면 잘 될거라네요.” A 대표는 그동안 여러 곳의 용하다는 점집을 순례했다며 그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가늠할 공통점을 찾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습니다.

며칠 상간에 비슷한 일을 또 한번 겪었습니다. 이번엔 해외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분 얘기입니다. 부르기 쉽게 C 변호사라고 칭하겠습니다. C 변호사는 스님 한 분을 거의 추종하다시피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소개해 줘서 6개월 전 쯤에 처음 만났다는데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답니다. “커피숍에 앉아 있었어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저 분이구나 할 정도로 범상치 않은 눈매를 가진 분이 다가와 앉는 겁니다. 그리고는 인사말 한마디도 없이 제가 처한 고민을 바로 짚어내는 거에요.” C 변호사 역시 인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 올 어떤 결정을 할 찰나였습니다. 결론은 A 대표와 비슷합니다. 그는 스님의 말을 듣고 애초 가졌던 결심을 굳히게 됐다고 합니다.

필자가 직접 경험했던 일들 외에도 정치, 경제 등 각종 영역에서 점에 관한 일화들은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유명 대기업 회장이 임직원들을 뽑을 때 유명한 관상 전문가를 옆에 대동하곤 했다는 얘기에서부터 정치인들이 출마에 앞서 가장 먼저 찾는 집이 점집이라는 설(說)이 있을 정도입니다. 많게는 수조원이 오가는 M&A 거래를 하는 사모펀드(PEF) 운용사들도 협상 길일을 잡기 위해 점집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잘 드러내진 않지만 한국에 사는 많은 이들, 특히 영향력 있고, 중요한 일들을 하는 분들일수록 점집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보입니다. 영화 ‘관상’ 속이야기들이 수백년 뒤 첨단 사회를 걷고 있는 오늘날에도 재연되고 있는 셈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말년에 가장 공을 들여 연구한 책이 주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는 당시 지성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렇다고 천주학으로도 해명하기 어려웠던 세상의 작동 원리를 주역에서 찾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사회 권력층들은 다산처럼 주역을 스스로 연구하기엔 힘이 부치니 주역 해석을 직업으로 삼고 있거나 각종 신기를 내려 받아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는 모양입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의 유명한 점집만큼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손’도 없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물론, 점이라는 것이 자기 확신을 강화해주는 보조 수단일 뿐이긴 합니다만 때론 한 사람의 결정과 운명을 바꾸는 일도 비일비재했을 겁니다.

점집에서 내린 결정 하나가 한국 현대사의 몇 장면을 바꿔 놨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18(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