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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3개년 계획은 대통령 담화문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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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기 경제부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대국민 담화문를 통해 강조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원본(原本)’이 기획재정부는 물론 청와대 내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박 대통령은 이날 “천추의 한을 남겨서는 안된다”며 혁신 3개년 계획의 이행의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실행계획은 정부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발생한 걸까요?

기재부와 청와대는 당초 혁신계획의 얼개를 3대 전략, 15개 핵심과제, 100개 상세과제로 정한 뒤 국민경제자문회의라는 형식을 빌어 발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재부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19일 사전 브리핑을 하고, 21일 300페이지 분량의 상세자료를 배포한 뒤 25일 청와대 회의가 끝나면 현오석 부총리가 브리핑을 한다는 스케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 형식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혁신 3개년 계획은 ‘대통령의 아젠다’인 만큼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계획을 수정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담화문 발표 후 국민경제자문회의 개최’라는 기형적인 ‘포맷’이 나온 겁니다.

취임 1주년 이벤트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준비되면서 사전에 청와대 참모진과 기재부가 합의한 혁신계획의 틀도 전면 수정됐습니다. 청와대에서 15개 과제가 많아 추려내야겠다는 의견을 내면서 핵심과제가 ‘9개+1(통일)’으로 압축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M&A 활성화를 통한 창조경제 활성화 방안’ 등이 주요 내용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습니다.

게다가 대통령 담화문의 단 한 글자도 사전에 누설되서는 안된다는 함구령도 내려졌습니다. 반면 기재부는 “이미 언론에 사전배포된 자료에는 3개년 계획의 구성이 ‘3대 전략 15개 핵심과제, 100대 상세과제’로 돼 있다”며 “담화문의 얼개라도 미리 알려 수정하도록 해야 오보를 막을 수 있다”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대통령의 담화문 관련 내용을 사전 유출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며 끝까지 기재부의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기재부는 담화문 발표를 지켜본 뒤 박 대통령이 강조한 핵심과제를 요약한 참고자료를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담화문 발표 후에도 혁신 3개년 계획의 골격이 9개 핵심과제냐, 15개 핵심과제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취임 1주년 행사가 막판에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라는 이벤트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정작 혁신3개년 계획의 실체는 없는 황당한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기재부 당국자는 “누가 혁신 3개년 계획을 보자고 하면, 대통령 담화문을 줄 수밖에 없다”며 “모든 ‘버전(version)’의 혁신계획안이 휴지조각이 됐다”고 푸념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청와대와 기재부간 혼선을 사전에 정리해줄 책임있는 고위 당국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정부 당국자는 “이번 사태는 국정운영시스템의 공백을 드러낸 참사”라고 말하더군요. 대통령에게 혁신 3개년 계획의 준비 과정을 설명하고, 전달과정에서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 조정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해야 하는데도 아무도 ‘총대’를 메지 못했다는 겁니다.

또 다른 기재부 관계자도 “이 정도 상황이면 전쟁이 나더라도 대통령에게 서면보고를 한 뒤 결재를 받아서 대응을 할 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기재부는 지금부터 혁신3개년 계획을 다시 짜야 한다고 합니다. 대통령 담화문에 맞춰 전략과 핵심, 상세과제, 실행계획까지 다시 다듬어야 합니다. 참고로 기술적인 이유로 담화문에 빠진 M&A 활성화는 상세과제에 포함된다고하네요. 청와대에선 M&A라는 용어를 일반 국민들이 어려워할 수 있어 뺐다고 했답니다.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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