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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앙숙' 제2탄 : 서청원 vs 이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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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태 정치부 기자, 국회반장) 한국정치사를 통털어 ‘킹메이커(king maker)'에 가장 근접한 정치인을 꼽는다면 서청원과 이재오를 떠올리게 된다. 단 한번의 선거승리를 이끈게 아니라, 둘은 이명박·박근혜 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면서 양측의 캠프를 진두지휘했다.

이 의원은 15대 국회에서 만난 이 전 대통령의 경부운하 건설안에 매료돼, 즉석에서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테니까 형님은 대통령 하쇼"라며 대권도전에 의기투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거쳐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경선에서 신승한후 ‘대권’을 거머쥐기까지 이 의원과 ‘공’을 다툴만한 이는 드물다.

현재 박 대통령의 배후에는 서 의원이 있었다. 1998년 당 사무총장으로서 박 대통령의 정계입문을 도왔고, 2002년 이회창 전 의원과 당권-대권분리 문제로 탈당한후 고립무원 처지의 그를 복귀시킨 것도 당시 당대표를 맡았던 서의원이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경선때 서 의원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반대편에 서면서 ‘친박(친 박근혜)연대’를 꾸렸고, 반대 캠프의 핵심인 이 의원과 돌이킬 수 없는 ‘앙숙'관계로 변하게 된다. 중앙대 2년 선후배사이인 서 의원과 이 이원이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이명박-박근혜란 정치라이벌로 인한 대리전 때문이었다.

공교롭게 둘은 조선시대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던 대구서씨(大丘徐氏)와 재령이씨(載寧李氏)의 후손이다. ‘3정승 3 대제학’을 배출한 소론파의 대구서씨와 ‘골수야당’인 남인(南人)파의 재령이씨는 뿌리깊은 반목(反目)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서 의원이 지난해 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복귀하면서 둘은 다시 한배(새누리당)를 타게 됐다. 하지만, 정치역학구도상 둘이 ‘평화공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엔 갈등요인들이 잠복해 있다. 대표적인 게 친박(親朴)과 비박(非朴)간 대결구도이다. 박근혜 정부 1년간 ‘정중동(靜中動·조용히 있는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음) 스탠스를 취했던 비박 등 비주류계가 서서히 전면에 나서고 있다. 올해 6.4지방선거와 전당대회란 ‘빅 이벤트’를 계기로 잠재된 계파간 갈등이 분출될 것이며, 친박(親朴·친박근혜) 중심의 당내 역학구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란 예상이 많다.

이러한 계파갈등의 중심에는 ‘원조친박' 서 의원(7선)과 친이(친이명박)계 좌장인 이 의원(5선)이 있다. 둘은 새해벽두부터 정면 충돌했다. 이 의원은 지난 1월 8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개헌론’을 꺼내 들었다. “개헌은 예측 가능한 정치를 보여주고, 국민 75%가 찬성하고 있다"며 “국민 의견을 따라가는 것이 소통이며, 이에 반대하는 것은 불통”이라며 친박계를 정면 비판했다. 박 대통령이 이틀전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개헌 불가론’에 반기를 든 것이다.

조용히 듣고 있던 서 의원이 “무슨 개헌이냐"며 발끈했다.이어”이명박 정권때 개헌특위 만들어 정권 2인자로 힘이 있었지만 이를 추진하지 못했다"며 “지금 국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살펴야 할 때”라고 면박을 줬다.

서 의원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역력했고, 이재오 의원 역시 매우 상기된 모습이었다.

한발 물러선듯 하던 이 의원은 다음날 트위터에 ‘작은 충성을 하는 것이 곧 큰 충성의 적이 된다’는 뜻의 “行小忠 則大忠之賊也”(행소충 즉대충지적야)라는 글귀를 남겼다. 서 의원 등 친박을 겨냥한 말로, ‘개헌론’을 거둬들일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작은충성’ 운운에 서 의원은 주요 당직자 워크숍에서 “국민을 먹고 살게 해줘야 하는 정치의 본질을 무시한 채 개헌만 가지고 집안에서 싸움박질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이 의원과 경쟁하려는 것은 아니고, 솔직히 말해 이 의원과 나는 싸울 군번도 아니다”라며 앙금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의원은 개헌 뿐만 아니라 지방선거 공천권문제 등 사사건건 당론에 맞서고 있어 서 의원등 친박계에겐 ‘눈엣가시’같은 존재다. 더구나 서 의원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권도전 가능성이 커진 만큼 앞으로 둘간 ‘리턴매치’는 새누리 정치지형을 바꿀 핵심변수로 떠올랐다.

중앙대학교 동문인 둘은 정치입문 초기엔 ‘한배’를 탄 정치적 동지로서 막역한 사이였다. 1981년 민한당 소속으로 출마한 서 의원이 곧바로 김영삼(YS)계로 합류했고, YS계 실세였던 최형우 전 의원을 통해 1996년 국회에 입성한 이 의원은 2년 동문선배인 서 의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 사무총장을 할 때 대학 후배인 이 의원을 ‘끔찍히' 챙겼다. 1998년 서 의원이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 나섰을 때는 이 의원이 캠프에 참여해 돕기도 했다.

하지만, 둘은 이명박 박근혜란 정치라이벌의 대권경쟁을 이끌면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양 캠프의 야전 사령관을 맡은 서의원과 이의원의 진흙탕 싸움은 불가피했고, 둘 사이도 ‘애증관계’에서 치유불능의 ‘앙숙관계'로 변해갔다. 경선이 끝난후 이 의원은 언론을 통해 “박 전 대표 쪽이 네거티브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서 의원은 “누가 누구에게 사과하라는 것이냐”라고 맞받아치기도 했었다. 양진영이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치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둘간 갈등은 18대 총선을 앞둔 2008년 1월께 ‘이재오 살생부'란 것이 공공연히 나돌고 서 의원 등 친박인사들이 공천에서 모두 탈락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공천학살’에 반발한 친박인사들은 모두 탈당했다.이 같은 공천결과의 배후및 친이-친박계 갈등의 진원지로 지목된 이 의원도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치열한 경선과 대선의 후유증으로 지역구 민심이 돌아서는 바람에 이 의원은 낙선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한시적지만 정치야인으로 돌아갔다.

서 의원은 나중에 친박연대의 공천헌금 사건으로 감방에 들어갔다.나란히 대통령 승리를 일궈냈고, 승리의 일등공신이지만 정권 2인자의 ‘영화'를 누리기는 커녕 둘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정치적 시련을 겪은 것도 닮았다.

정치권 ‘앙숙’인 서 의원과 이 의원의 집안도 파벌싸움으로 수백년 동안 반목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서 의원은 3정승과 3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집안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상중 정조대인 18세기 후반에 대제학을 지낸 서영보(徐榮輔)는 다산 정약용을 차석으로 제치고, 수석을 했던 인물이다.그는 ‘만기요람(萬機要覽)‘이란 군왕의 필독서를 남겼다.

서 의원 집안의 정치적 노선은 소론(少論)이었다. 소론은 집권여당인 노론(老論)과 야당인 남인(南人)의 중간에 있었지만, 서 의원의 집안은 노론과 매우 가까운 노선이었다. 서 의원 집안이 조선후기 중앙정치에서 중용됐던 이유다. 반대로 재령이씨(載寧李氏) 이 의원 집안은 야당인 남인이었다. 17세기 경상도 남인의 울분을 대표했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바로 이 의원의 직계조상이다.

이 의원은 1월말께 여당의 금지영화인 ‘변호인’을 본후 트위터에 남긴 소감이 화제가 됐다.

그는 “잊고 살았던 고문당한 전신이 스멀스멀 거리고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전신이 옥죄이면서 아파진다. 비단 나 뿐일까”라며 “아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눈물이 난다”라고 썼다.

‘골수야당’ 남인의 피가 흐르는 이 의원의 이 같은 ‘야당본능’은 앞으로 서의원과의 지난한 충돌을 예고하고 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11.16(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