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대기업 협력사의 기업설명회(IR) 자리에서 발표자로 나선 대표이사의 답변입니다. IR은 상장사가 투자자들과 소통하는 자리입니다. 그동안의 성과를 공유하고 향후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회사와 투자자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IR에 나오는 대기업 협력사들이 늘 걱정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괜히 말을 잘 못 꺼냈다가 의도치 않은 대기업의 ‘기밀’을 유출하는 것입니다. ‘자랑질’을 하다가 ‘역효과’가 나는 경우입니다.
협력사는 대기업이 그리는 큰 그림에서 일부를 맡고 있으니 자신들은 그게 대단한 정보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에서는 협력사가 의도하지 않게 밝힌 내용이 기술적으로 매우 민감한 게 많습니다.
예컨대 한 재생용지 전문업체는 S사 포장 박스에 자사 제품이 쓰일 예정이라는 내용을 발표했다가 급히 철회한 바 있습니다. S사가 제품에 쓰이는 부품이나 소재를 모두 친환경으로 변경하기로 했는데, 이는 회사 전반의 제품전략이 바뀌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전문 소재 협력사는 한 대기업과 제품 겉면의 소재를 같이 개발하기로 했다고 밝히는 과정에서 이 대기업의 가장 중요한 ‘스펙’이 알려지는 불상사도 발생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업계에서 가장 많이 꼽는 게 협력사들의 경쟁력 향상입니다.
과거 협력사들은 대기업이 그려준 도면대로만 만들어 불량 없이 제때 납품하는게 핵심 경쟁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제품 개발 초기 단계서부터 협력사들이 참여하는 일이 많습니다. 협력사 덩치가 커지고 자체 연구개발(R&D) 능력을 갖추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협력사는 이 과정에서 더 많은 기술을 쌓게 되고, 대기업은 리스크를 덜 수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죠. 이렇다 보니 과거에는 협력사로서 알기 힘든 대기업 기밀 사항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 관심이 큰 IT 제품이나 자동차의 ‘스펙’이 자세히 알려지는 일이 있는데, 이런 사례 중 상당수는 협력사들이 의도하지 않고 흘린 정보의 결과물입니다.
앞으로 협력사들에 대한 ‘입단속’은 더욱 강하될 전망이지만, 과거처럼 불러다가 ‘군기’를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어서 대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