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주먹고기를 구우며 함께 소주 잔을 들이키던 일선 경찰서 A 형사과장이 느닷없이 쏟아낸 넋두리입니다. 일선서 과장은 경찰의 꽃이라는 총경(일선 경찰서장) 바로 아래 직급인 경정입니다. A과장은 지난달 총경 승진 인사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경찰서에서는 10년 넘게 한 번도 형사과장이 총경으로 승진한 케이스가 없었다”며 “승진을 위해선 강남 쪽에 있는 경찰서로 가는 길 밖에 없다”며 연거푸 술잔을 비우더군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어색한 자리였습니다.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지만 경찰 조직, 그 중에서도 일선 경찰서 과장인 경정급 이상 간부들의 승진에 대한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경정부터는 일정 기간이 지나 진급하지 못하면 그 계급에서 경찰 생활을 접어야하는 ‘계급 정년제’가 적용되기 때문이지요. 경정을 달고 14년 안에 총경이, 총경은 11년 안에 경무관이, 경무관은 6년 안에 치안감이 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합니다. 현실은 더 살벌합니다. 인사적체로 경정을 달고 8년 안에 총경이 되지 못하면 승진은 물건너갔다고 봐야합니다.
그러다보니 진급에 유리한 요직으로 가는게 무엇보다 중요한데요. 보통 경찰청, 서울지방경찰청과 같은 ‘청’에서 근무하는 것이 승진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론의 관심을 받는 중요사건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오며 가며 경찰 고위직들의 눈도장을 찍을 기회가 많아서죠.
일선 경찰서 가운데서는 강남·서초·송파·수서경찰서가 ‘4대 명문’으로 꼽힙니다. 거주 인구가 많아 실적을 많이 낼 수 있고 사회적으로 관심을 끄는 대형·강력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다른 부문도 마찬가지지만 폭행, 강도, 절도, 살인 등의 강력범죄를 다루는 형사과에서는 이 네 곳 경찰서를 거치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몇 달 전에 저녁자리를 함께한 전직 고위 경찰간부는 “강남 쪽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술 마시고 노는 곳이기 때문에 이들이 관련된 사건을 매끄럽게 처리해주면 고위층과의 인맥을 쌓기에도 유리하다”고 말하더군요. 90년대까지만해도 종로·남대문·동대문 경찰서 등 강북 지역 경찰서들이 주요 경찰서로 대접받았지만 요즘엔 강남쪽 경찰서가 대세입니다.
승진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때로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지난해에는 진급 압박에 시달리던 한 일선 경찰서 정보과장(당시 48세)이 자살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 과장은 경찰대 5기 출신으로 일선 경찰서의 과장들 중 최고참급이었습니다. 현장에서는 “승진하는 자리로 가기 위한 몸부림과 스트레스가 있었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긴 유서가 함께 발견됐습니다. 숨진 정보과장의 경찰대 2년 후배인 다른 일선경찰서 과장은 “승진 시즌만 되면 승진하게 해주겠다고 브로커들이 찾아와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돈이나 빽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대로만 인사가 이뤄져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