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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어느 회계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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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정 증권부 기자) “여보. 힘들다고 할때 회사 그만 두라고 얘기 못한거 미안해! 다음 생애에서 만나면 그때는 내가 당신처럼 성실하고 착한 가장이 되어줄게. 사랑해."

회계사들 사이에서 감사 출장을 갔다가 사망한 어느 회계사 부인의 문자메시지가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대형 회계법인의 회계사가 돌연 사망하자, 유족들은 이를 과로사로 보고 “불쌍한 죽음이 되지 않도록 관심 가져달라”며 카카오톡으로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뿌린 겁니다.

감사 시즌으로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는 회계사들은 ‘남 일 같지가 않다’며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저도 회계법인 관계자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고 사망한 회계사가 근무하던 회계법인에 급히 연락을 해보았습니다.

회계법인이 파악한 바로는 고인은 지난 주 제주도 호텔 감사업무로 현지 출장 중 호텔방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는데, 자살이나 타살 흔적이 없어 심장마비로 추정된다는 경찰 의견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검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과로사 여부를 단정지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직원이 일 때문에 제주도로 출장갔다가 변을 당했는데 ‘과로사로 단정지을 수 없다’며 선을 긋는 회계법인의 답변을 들으니, 이해는 가면서도 현실은 참 냉혹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족이 뿌린 메시지를 보면 사망한 회계사는 꾸준히 건강검진을 받아왔고 지병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 12월 부터 미국출장, 지방출장을 다녀오고 1월엔 감사 시즌이 되어 주말, 밤낮 할 것 없이 전국을 돌며 일했다고 합니다. 메시지엔 ‘죽도록 일만 하다가 홀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대부분 기업들은 12월에 한 해의 회계결산을 하기 때문에 기업들의 감사를 맡은 회계사들은 결산 직후인 1~3월이 가장 바쁩니다. 게다가 회계법인들이 실적 악화로 최근 1~2년간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감사 인력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습니다. 특히 이번에 사망한 회계사가 다니는 회계법인은 얼마 전 감사 인력이 부족하다는 내부 비판이 나왔던지라 해당 법인에선 더욱 민감해하고 있습니다.

젊은 회계사들을 만날 때마다 직업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5개 기업 감사하면 집 2채를 샀던 시절이 있었다는 둥, 지방 기업에 감사하러 내려가면 공항에 수 십명이 줄지어 리무진까지 모셨다는 둥 회계사 선배들의 과거 무용담은 화려하기만 한데 지금 본인들의 처지는 평범한 직장인보다도 못한 乙중의 乙에 불과하다면서요. 기업들에게 감사를 따내기 위해 굽신굽신 해야 하니 외부감사인으로서의 독립성은 추락할 수 밖에 없다고 푸념합니다.

감사 업무는 감사비용을 부담하는 주체와 감사정보를 이용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피감 기업은 되도록 비용을 줄이고 싶어하고 회계법인들은 저가 수주에 나서면서 결국 감사 품질이 떨어지고 부실감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적정 감사수수료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회계사들의 처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감사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금융감독원에서도 감사인 지정제도 확대 등 저가 수주를 막기 위한 여러가지 개선책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회계사 죽음의 사인이 정확히 어떤 것이든 간에 이번 사건을 계기로 회계업계에서도 무리한 덤핑 수주를 자제하는 자정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저는 당장 헬스장을 끊고 건강관리에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기자 일을 하다 회계법인으로 이직한 선배의 말을 들어보니 회계사보다 기자의 업무 강도가 더 세다고 하네요.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한다’. 오늘 얻은 가장 큰 교훈 입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5.01.2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