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자는 “내신들은 질문자를 어떻게 정했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제비뽑기로 추첨해서 뽑았다”고 했더니 그 기자 왈, “우리한테는 연락도 없다. 너무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6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기자회견장. 예상대로 일본 기자들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회견장 맨 뒷줄에 앉아 있더군요. 알고 봤더니 청와대에서 외신에는 질문자 2명을 배정했는데, 이미 로이터와 중국의 CCTV로 지정한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CCTV 기자가 유창한 한국말로 질문한 것에 대해 박 대통령이 ‘극찬’까지 하자 일본 기자들은 그야말로 뿔따구가 난 표정이었습니다.
급기야 기자회견이 끝나고 박 대통령이 기자들이 일하는 춘추관을 돌고 있을 때 몇몇 일본 기자가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번 기자회견은 내신들한테도 불만 투성이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치열한 질문 경쟁을 벌이는 것은 기자들의 숙명입니다. 더구나 대통령 취임 후 첫 기자회견으로 전 국민적 관심이 쏠린 만큼 너도나도 질문 기회를 따내기 위한 사전 눈치작전이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과거 정부가 그랬듯이 이번에도 질문자 수를 제한했습니다. 기자들은 할 수 없이 매체분야별로 모여 제비뽑기나 사다리타기를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당첨 안된 대다수 기자들은 적잖이 마음도 상하고 “이런 기자회견을 왜 하냐”며 불만도 터뜨렸습니다.
질문은 기자회견 사흘 전 미리 정한 상태였고 청와대는 이를 건네받아 답변자료를 만들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덕분에 기자회견 도중 뜻하지 않은 질문에 당혹스러워하거나, 머뭇거리는 일이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준비된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기자회견을 TV로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아마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겁니다.
질문을 매체 분야별로 각각 정하는 바람에 정작 빠져선 안되는 중요한 질문이 누락된 일도 벌어졌습니다. 예컨대 박 대통령의 ‘불통’을 얘기할 때 단골로 지적되는 ‘인사문제’는 어떤 기자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새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인 경제민주화 관련 질문도 없었습니다.
출입기자 입장으로 봐서도 여러가지로 부족했던 기자회견이었던 셈이죠. 미국 백악관에서 볼 수 있는 '각본 없는 즉석 기자회견'을 우리는 왜 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자실을 방문했을 때 요청해 봤습니다. “다음 기자회견은 자유토론 형식으로 하시는 것 어떨까요”라고요.
하지만 박 대통령은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작년 여름에 한 기자들과 오찬이 그런 것 아닌가요?” 작년 7월께 청와대 내 녹지원에서 열린 기자단 오찬행사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야외 잔디밭에 차려진 뷔페를 먹으면서 가벼운 농담이 오간 것 말고는 현안에 대한 질의응답 자체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번 기자회견에 대한 여론조사도 그다지 우호적인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소통에 도움이 됐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률이 50%를 밑돌았다는 것을 보니 말이죠.
박 대통령이 혹여나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앞으로 한동안 기자회견을 꺼리는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싶습니다. 청와대 출입하는 동안 제대로 된 기자회견을 한 번이라도 해야 할 텐데 말이죠. (끝)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중앙일보=최승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