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양천경찰서 "대통령 오시니 플래카드 치우세요"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이현진 건설부동산부 기자) 서울 목동지구는 행복주택 추진 예정지역 가운데 가장 ‘뜨거운 감자’ 입니다. 가장 먼저 반대주민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지방자치단체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반대성명서를 발표했어요. 국토교통부와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가장 어려운 지역으로 꼽고 있는 곳도 목동지구지요.

이곳에서 4일 오전 9시께 ‘행복주택 추진 반대’ 내용을 담은 플래카드를 두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답니다. 양천경찰서 경비과에서 갑자기 “플래카드를 철거하라”고 요구했고, 건물주가 플래카드를 치운 것이지요. 당황한 주민들이 “왜 떼버리느냐”고 항의하자 양천서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플래카드를 볼까봐”라고 대답했답니다.

이날 박 대통령은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 출범식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 송도로 갔는데요, 가는 도중에 목동지구를 지나가게 돼 있었던 것이지요. ‘보기 좋지 않은 것은 치우는 게 좋지 않느냐’는 게 플래카드를 떼낸 이유지요.

결국 대통령이 탄 차가 지나가고 나서 주민들이 다시 플래카드를 걸었는데요, 잠시 뒤에 경찰이 다시 떼버렸습니다. “대통령도 지나갔는데 왜 떼느냐”고 항의하자 양천서 관계자는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했답니다. 당연히 주민들은 노발대발했고요. 신정호 주민비대위원장이 크게 항의하자 “그럼 다시 걸라”고 했다네요.

목동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길정우 새누리당 의원은 “대통령도 민심을 알아야 하는데 경찰이 멋대로 플래카드를 치워버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통을 터트리더군요. 양천경찰서는 “너무 바빠서 확인해주기 힘들다”며 답변을 피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나요? 좀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1787년의 러시아 이야깁니다.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배를 타고, 새로 합병한 크림반도 시찰에 나섰습니다. 그 지역을 담당하던 그레고리 포템킨 장군은 빈곤한 마을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강변에 ‘가짜 마을’을 급조했어요. 여제의 배가 지나가면 세트를 해체해 다음 시찰 지역에 다시 짓고, 다시 짓고 하는 식이었지요. 여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주민들이 잘 살고 있군’이라고 착각했겠지요.

행복주택은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처음 발표한 공약입니다. 취임한 뒤에도 제일 먼저 추진한 주택정책이고요. 행복주택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논리가 옳든 그르든, 박 대통령이 이곳 상황을 아는 게 문제일까요, 모르는 게 문제일까요? 플래카드를 치워버린다고 갈등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지도자에 대한 잘못된 ‘충정’이 230여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네요. 박 대통령을 군주시대 황제쯤으로 생각했을까요? /apple@hankyung.com

오늘의 신문 - 2024.05.02(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