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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오원철 기아경제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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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엔진만 대체한다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개발담당
이었던 신용백씨(현 기아자동차 전무)의 얘기를 들어보자.

"기존 군용차량을 대폭 개조해서 군 운용상에 차질없도록 하라는 지시
는 실무책임자로서 너무나 엄청나고 무거운 책임이었습니다. 기술수준은
형편없는 상태였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하라고 하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ADD의 기술지원하에 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범과 ADD에서 보내온 각종
기술데이터, 현품스케치등 백방으로 자료를 확보해서 탑재방안을 검토
했습니다. 그리고 엔진개조부위를 확정하고 개조 키트(Kit)의 범위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전군에 흩어진 차량을 우리회사가 직접 탑재해 준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돼 현지 부대에서 탑재할수 있도록 했습니다. 개조방법에
대해서는 책으로 만들어 배포했고 부대에 직접 가서 모델케이스로 탑재
시범작업도 하였습니다. 막상 탑재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어요. 한 차종
에 대한 엔진탑재작업이 아니라, 여러 차종에 해야 했으니 문제가 나올수
밖에 없었지요. 엔진개조 키트의 품질도 문제였습니다. 사용자의 불만은
점차적으로 고조되었습니다. 불만내용으로는 탑재가 잘 안된다, 힘이
없다 등등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었고 급기야는 부산 차량재생창에 가서
엔진성능에 대해 재확인하라는 특별지시까지 나왔습니다. 시험결과 엔진
은 아주 좋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후 보완을 거듭하면서 겨우 작업
을 끝냈습니다. 기아나 군 모두 고생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이 토대가 되어 군용표준차량개발이 가능했다고 생각
합니다. 그때 경험에 대해 이자리를 빌려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ADD와 기아는 본격적으로 군용 지프차 개발에 들어가게 됐다. 기아는
기구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76년4월24일 국무회의는 ''군용차량 국내생산 방안''을 의결, 그해 8월
26일 군수심의회에서 통과됐다. 이어 9월28일에는 군용차량 국내생산
계획 확정지시가 떨어졌다.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개발해서 생산하는데
2년안에 끝내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일부에서는 국산군용차의
성능문제로 반대도 있었으나 대통령의 국산화지시가 있었고, 당시 방산
을 담당하던 국방부 요원들의 소신에 의해서 단안이 내려졌다. 76년
이라면 성능상 문제가 제기될만한 공업수준이었다. (당시 국방부의 의사
결정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2년내에 개발을 끝내라는 지시는
당시 군의 기동장비 상황이 어려웠음을 짐작케 한다)

한국형 군용지프차 개발의 기본방향은 <>성능:M606, J601 유사성능-
미 군원(MAP) 차량성능 수준 <>외형:독자적 한국형(한국내 최초 고유
모델) <>엔진:이미 개발된 MVA-2000엔진 <>호환성:이미 보유중인 차량
과 (단위 기능별) 호환성 부여의 네가지였다. 개발일정계획표도 작성
했다.

여기서 기아자동차의 개발본부조직도와 한국형군용지프차 개발일정표
를 게재하는 것은 ''새로운 자동차 개발을 1년정도에 끝내는 것은 상식적
으로는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 작업이 실제로 진행되었다''는 긴박한 사정
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전쟁때나 있을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러한 일
을 해낸 당시의 방위산업 담당자들의 정열과 노고를 되새기기 위해 기록
에 남겨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후손에게도 우리민족이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떠한 일도 해낼수 있는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을 이 사건을
실례로 삼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예컨대 지프차 개발에 있어서는
자료수집을 해서 계획을 장성한 다음 승인을 얻은후 설계에 들어간다.
설계가 끝나면 제1차 개발시제에 들어간다. 이때 보통 한대의 시제품을
만든다. 이 시제품에 대한 시험을 하고난후 미비점을 보완해서 제2차
개발시제를 해서 또 시험하게 된다. 이러한 보완과 시제를 되풀이한후
종합시험을 하는 것인데 군용차에 있어서는 부대시험까지 하게 되는 것
이다. 부대시험에 합격한 후에야 기계설비를 발주하게 된다. 기계설비가
도입된 후에도 양산시제를 해서 생산된 제품을 시험평가한후 양산을 개시
하게 된다. 보통 6년이 소요된다. 이런 일을 1년에 끝내겠다는 것이니 당시
이 일에 종사한 사람들은 모두 미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고 성공을 했으니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큰 일을 해냈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많이 써왔다. 산업발전의 흐름을
이야기 하려고 하니 자연 정책을 다루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주로 현장에서 심혈을 기울이며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산업전사
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한국형 군용지프차의 개발일정표를 보면
세부사업이 순서대로 진행되는 식은 아니었다. 사업을 추진할때 정상적
인 경우에는 앞서 설명한대로 단계별로 순서가 있게 마련이지만 이러한
순서는 완전히 무시됐다. 모든 일이 일시에 시작된 것이다. 계획승인이
나기도 전에 일이 시작되는가 하면 계획승인이 나자마자 기계설비 도입
이 개시된다. 제1차 개발시제도 5대를 단번에 만들어 이중 한대로 부대시험
까지 하겠다는 계획이다. 개발 시작후 8개월만에 1차 시제품을 만들어서
9개월째부터는 부대시험을 하겠다는 것이고, 이런 모든 일을 끝내고 개발
개시후 12개월만에 양산을 개시하겠다는 안이었다. 이 계획에서는 78년
3월부터 양산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좀 늦어져서 그해 6월부터
양산이 시작되었다. 이때 생산된 지프차 1백8대가 동년 10월1일에 거행
된 국군의 날에 참가하게 된다. 이 설명으로 지프차의 개발생산이 어느
정도의 초 스피드로 진행되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런 계획안을 살펴
보고 있노라면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진짜로 전쟁이 터졌던 것이
아니냐''하고 느낄 것이다. 군에서는 지프차의 개발기준으로 미군에서 쓰고
있는 M606으로 정했다. 다만 전원만 12V에서 24V로 개조토록 요구했다.
M606이 선정된 이유는 J601형과 거의 유사, 부품의 교환성을 고려해서다.
군에서 보유하고 있는 지프차는 M606과 J601의 두가지 차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모두 부품의 교환성이 있었다. 또 M606은 성능이 우수하고
차량이 간단하며 운전조작이 용이, 한국인 체격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내구성 등의 면에서도 유리하다는 근거가 있었다. 연구는 모델 제작에
들어가면서 군에서 보유중인 차량과 최대한의 부품호환성을 유지해야 한다
는 명제하에 차량의 스타일부터 검토했다. 자동차 스타일 전문가가 없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력으로 출발
했다. 우선 4개의 모델을 제작해냈다. 1호차는 한국 고유형, 2호차 3호차
는 J601 유사형, 4호차는 CJ-5 유사형으로 만들어 77년5월23일 육군본부로
가지고 갔다. 육군참모총장이하 고급간부가 참관하고 난후 독자적인 한국
형으로 고치라는 지적이 나왔다. 기아의 개발본부는 즉각 스타일링(styling)
를 채용, 한국에서는 최초로 독자모델을 설계개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일본의 스타일리스트도 초청해서 자문을 받았다. 당시 개발에 참여했던
정인종씨(현 기아자동차 승용개발부장)의 회고.

"이때 개발된 모델은 77년6월27일 ''황소분과위원회(군용차량개발분과
위원회)''에서 OK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성용백차장(현 기아자동차전무)
이 팀장으로 거의 24시간 작업한 결과로 기쁘기 이를데 없었지요. 이제
모델제작문제는 끝을 냈다고 생각, 한숨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77년11월22일 제3차 황소사업운영위원회에서 차량의 보닛 형상
의 변경을 또다시 요구해 왔어요. 또다시 고생문이 열린 것이죠. 이때
갓 입사한 스타일리스트인 박모씨(현 대학교수)는 사무실을 집삼아 새로운
보닛형상을 디자인하였는데 3일만에 무려 60장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개발본부에서 평가, 1개안을 선정하고 시제품을 만들기로 하였습
니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모양만 그려놓은 도면입니다. 그러니 이 모양대로
제작하려면 설계도면으로 고쳐 그려야 제작을 할수 있게 됩니다. 한데
상부에서 이 설계도를 이틀 동안에 완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인데 그때는 해냈으니... 요즘의 방법은 디자인
이 끝나면 진흙으로 실물크기의 모델을 만들고 이 모델을 수정해서 최종
모델을 확정짓습니다. 그다음 완성된 모델을 실제로 측정해 가면서 설계도
를 그리는 것이 상식이지요. 그때는 이런과정을 전부 생략하고 스타일리스트
와 설계자가 머리로 추측해가면서 도면을 만들었으니 상식밖의 일을 한
거지요.

그러나 당시 기아에는 ''판금도사''라고 자처하는 판금공(수작업으로 철판
을 가공해서 모양을 만드는 기술자)이 있었습니다. 디자인 도면과 설계도
를 주니, 설계도에서는 치수만 보고 디자인 도면대로 모양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신기한 기술도 다 있다고 느꼈습니다. 인간
문화재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노련한 판금공이 없어요. 이 모델 시제품을
만들어서 77년12월29일 육군본부로 갖고 가 완전승인을 받았습니다. 당시
의 안보상황과 방위산업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
됩니다. 현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외형
모델에 대해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
집니다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신문 - 2024.05.17(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