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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판돈을 베팅하기 전에 패를 까라는 게 단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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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리 IT과학부 기자)“어떻게 이런 법이 나오고 시행될 수 있는가. 정부와 정치권의 지적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된단 말인가.”(이병태 KAIST 경영대학 교수)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어떻게 버젓이 백주대낮에 무비판적으로 벌어질 수 있을까.”(권영선 KAIST 기술경영학과 교수)

이번 달부터 시행된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에 대한 비판이 거셉니다. 전문가들도 국내 통신시장 규제의 비논리성을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단통법 토론회에서, 권영선 KAIST 기술경영학과 교수는 블로그를 통해섭니다. 두 분석은 취재하면서 접한 여러 분석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어서 소개합니다.

이 교수는 단통법에 포함된 보조금 주간 공시제가 내재한 모순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가격 공개와 가격 경쟁은 공존(양립)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업이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격을 인하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가격 경쟁을 통한 고객 확보, 둘째는 재고 소진입니다. (서비스를 판매하는 통신사들은 재고가 없기 때문에 통신사들이 가격 경쟁에 나서는 이유는 첫번째에만 해당합니다.) 그런데 단통법은 통신사들이 주간 단위로 가격을 사전 공지하도록 강제화했습니다. 가격 인하(보조금 인상) 경쟁을 억제한 겁니다.

예컨데 A사가 가격을 내려 공지하면 B사는 이에 대응해 가격을 내립니다. 이렇게 가격 경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단통법하에선 주간 단위로 가격을 공개하다보니 B사가 즉각 가격을 내려 A사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 교수는 “게임 이론의 기초만 이해했어도 단통법을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포커 게임에서 판돈을 베팅하기 전에 패를 까보여야 한다는 규칙을 더한 것’이 단통법이란 겁니다. 이런 규칙을 정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상대의 패를 다 보고 나서 누구도 판돈을 올려 베팅하지 않을 겁니다. 통신사들이 가격 인하 경쟁을 멈추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는 “가격 인하 경쟁이 벌어지도록 유도하기 위해선 당연히 패를 숨기도록 해야 한다”며 주간 공시제의 비논리성을 지적했습니다.

권 교수는 단통법 도입 이전 방송통신위원회의 통신시장 규제와 처벌의 비논리성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최근 ‘단통법을 폐지해야 하는 근거’란 블로그 글에서 부록으로 이런 분석을 올렸습니다. 방통위는 수 차례 보조금을 상한선을 어겼다는(보조금을 너무 많이 썼다는) 이유로 통신사들에 벌금과 영업정지 벌칙을 부과했습니다. 영업정지는 일정기간 동안 신규가입자를 유치하지 못하게 하는 벌칙입니다. 상식대로라면 영업정지 기간 동안 벌칙을 받은 통신사 가입자는 줄고 경쟁사 가입자는 증가해야 합니다. 가입자를 많이 빼앗길수록 더 큰 벌을 받는 것이겠죠.

그런데 방통위는 영업정지 벌칙을 주고 그 기간동안 번호이동(통신사를 바꿔 가입하는 것) 상황을 더욱 치밀하게 감시했습니다. 겉으론 영업정지란 벌을 주고 그 기간동안 경쟁사가 벌 받는 통신사의 가입자를 빼앗아가는 것을 막은 겁니다. 권 교수는 “그럼 벌을 왜 주는 것인지, 이런 엉터리 영업정지를 어떻게 벌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습니다.

두 교수님의 분석은 단통법은 물론 그 이전의 통신시장 규제가 얼마나 상식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두 분은 모두 “단통법은 물론 모든 스마트폰 유통시장 관련 규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비논리적인 규제를 만드느니 차라리 시장 경쟁에 맡겨두라는 얘깁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4.27(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