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미술시장의 성장세는 눈부시다. 역대급 호황에 힘입어 경매 낙찰총액은 사상 처음으로 3000억원을 넘어섰다. 2030을 중심으로 수요층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양과 질 모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세계 시장과 비교하면 한국 시장의 눈부신 성적표는 빛이 바랜다. 시장 규모와 작품 가격 모두 서구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크게 뒤지는 게 현실이다.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이 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냉정한 평가다.
이 같은 급성장 배경에는 전 국민의 시선을 미술로 쏠리게 한 사건들이 있다. 지난 1월 타계한 ‘물방울 화가’ 김창열(1929~2021)의 작품들이 나온 경매가 대성황을 이룬 게 시작이었다. 이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들이 국보급 미술품·문화재 2만30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관심에 불이 붙었다. 전국 각지의 ‘이건희 컬렉션’ 관련 전시들은 관람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코로나19 이후 풍부해진 시중 유동성이 미술시장으로 몰린 것도 호재였다. 부동산은 너무 비싸 투자할 수 없고, 암호화폐나 증시는 변동성이 부담스러운 2030세대가 대거 미술 투자에 나섰다. 지난 10월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의 경우 아트페어를 처음 방문한 관람객 중 60%가 2030세대였다. 하나의 작품에 여럿이 쪼개서 투자하는 공동구매와 대체불가능토큰(NFT) 등 새로운 투자 방식의 등장도 한몫했다. 서울옥션블루에 따르면 지난해 변변한 통계조차 없었던 미술품 공동구매 시장은 올해 501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이 회사가 운영하는 공동구매 플랫폼 SOTWO(쏘투) 이용자 중 3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37.5%에 달했다.
세계도 한국 시장의 성장세에 주목했다. 독일의 쾨닉과 오스트리아의 타데우스 로팍은 각각 서울 청담동과 한남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독일의 페레스 프로젝트와 미국의 글래드스톤, 투팜스 역시 내년 서울에 분점을 낼 계획이다. 내년 세계적인 아트페어 ‘프리즈’의 한국 진출이 예정돼 있고, 1월에 양대 경매사 중 하나인 케이옥션이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국내 시장의 열기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 작가의 작품값도 답보 상태다. 올해 거래된 세계 최고가 미술 작품은 크리스티에서 낙찰된 파블로 피카소의 1932년작 ‘창가에 앉아 있는 여인’으로, 1억340만달러(약 1228억원)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 작가 작품 최고가는 2019년 김환기의 ‘우주(Universe 5-IV-71 #200)’가 기록한 132억원에 머물고 있다. 300억원대 기록을 보유한 중국의 우관중과 일본의 요시토모 나라 등에 비하면 턱없이 아쉬운 수준이다.
올해 국내 경매 실적만 봐도 국내 작가의 저평가가 눈에 띈다. 올해 국내 경매 낙찰가 1위는 지난 11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낙찰된 구사마 야요이의 50호 크기 그림 ‘호박’(54억5000만원)이었다. 한국 작가 중 최고가인 김환기의 붉은 색 점화 ‘1-Ⅶ-71 #207’은 40억원으로 3위에 그쳤다. 전체 낙찰가 상위 10개 작품 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구사마의 작품이었다.
미술시장 도약을 위해서는 미술관과 박물관의 작품 구입 예산을 대폭 늘려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이천 케이옥션 이사는 “경매 현장에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의 관심”이라며 “미술관 등 인프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확충해야 시장이 더욱 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국내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기초체력은 부족한 수준”이라며 “경매시장만 급성장하는 가운데 일반 화랑들이 이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작품의 거래 이력 등을 정리해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화랑들이 스스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미술품의 국내외 거래를 허용하고 제값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일본처럼 중요 문화재를 제외한 고미술품은 해외에 반출할 수 있도록 해 세계에서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자는 것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