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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조원 '불나방 베팅'…곱버스 올라탄 개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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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개미군단, 투자냐 투기냐
(1) 시장 뒤흔드는 '곱버스'

상장기업에 중장기 투자 않고
레버리지·인버스 ETF 초단타
장막판 兆단위 물량 쏟아내며
코스피지수 변동성 확대


국내 주식 계좌는 올해에만 194만 개 늘었다. 주로 개인 계좌다. 이들은 ‘개미군단’에 합세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폭락장에서 눈부시게 활약했다. 지난 3월에만 삼성전자를 약 5조원어치 순매수하며 증시 반등을 이끌어냈다. ‘동학개미’로 불렸다. 하지만 코스피지수가 1900선을 회복한 지난달 중순부터 활동이 뜸해졌다. 한국의 ‘우량주 바겐세일’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어 다른 개미군단이 등장했다. ‘도박개미’로 불리는 이들이다. 상장 기업에 중장기로 투자하지 않고, 원유나 지수를 따라가는 상장지수펀드(ETF)나 상장지수증권(ETN)을 거래한다. 초단타족으로 도박사와 비슷하다. 원유에서 최근엔 지수 레버리지나 인버스 상품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들은 ‘곱버스(곱하기+인버스)’라고 불리는 ‘KODEX 200선물인버스2X’를 삼성전자를 제치고 거래대금 1위 종목으로 올려놨다. 이 상품은 지수 하락률의 두 배 수익을 목표로 하는 ETF다. 동학개미가 주춤한 사이 도박개미가 세를 넓히자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이들의 투기적 성향은 곳곳에서 부작용을 낳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레버리지·인버스 ETF가 시장의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코스피지수가 급등락하는 날이면 장 막판 등락폭이 커지는 게 레버리지·인버스 거래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두 배 수익을 맞추려면 선물을 대량으로 거래해야 하고, 이는 다시 현물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선물시장(꼬리)이 현물시장(몸통)을 좌우하는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이다.

규모가 커지며 영향력은 더 강해지고 있다. 레버리지·인버스 ETF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5조원을 넘어섰다. 유가증권시장 거래대금의 50~70% 수준에 이른다. 레버리지 및 인버스 ETF 순자산도 10조원으로 불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레버리지·인버스 ETF 규모가 과도하게 커져 인덱스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며 “불필요한 변동성과 비용, 피해자를 야기하는 만큼 규모를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스피 3% 하락 때 '곱버스' 1兆 폭탄매도…"지수 변동성 확대"
'코덱스 인버스2X' 하루 거래대금, 삼성전자 제치고 1위


미·중 무역분쟁 재점화 우려로 시장이 출렁인 지난 4일. 오후 2시30분이 지나자 코스피지수는 낙폭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날 개장 직후 3% 가까이 떨어져 1900선을 내줬던 지수는 오후 1시께 1918까지 오르며 하락폭을 줄였다. 하지만 장 마감시간이 다가오면서 힘을 잃었다. 오후 3시가 지나자 낙폭은 더 커졌다. 결국 동시호가에서 1895.38(-2.68%)로 미끄러졌다. 막판에 쏟아진 투신권의 코스피200지수 선물 ‘매물 폭탄’ 때문이었다. 투신권은 오후 3시가 넘자 2043억원어치를 팔았고, 마감 동시호가에선 4305억원을 털어냈다. 이날 하루 7535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대부분 레버리지·인버스 상장지수펀드(ETF)가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기 위한 내놓은 매물이었다.

지수 1% 하락 땐 곱버스 자산 6% 처분

요즘 지수 등락폭이 큰 날마다 반복되는 패턴이다. 급락하면 장 막판 더 떨어지고, 급등하는 날엔 더 오른다. 시장 변동성이 더욱 커졌다. 이 같은 상습적인 지수 왜곡 현상은 레버리지·인버스 ETF 거래가 급증한 지난 3월부터 나타났다. 지수 향방을 놓고 홀짝 게임에 베팅하는 ‘도박 개미’가 등장한 시점이다. 당시 레버리지·인버스 ETF 순자산은 6조원대에서 9조원대로 급증했다.

지수 수익률을 그대로 따라가는 일반 ETF와 달리 레버리지·인버스 ETF는 장 마감 전에 선물 매매를 동반한다. 지수 상승률 또는 하락률의 두 배 수익을 맞추기 위해 주가가 오르는 날에는 선물을 매수하고, 떨어지는 날에는 선물을 매도한다. 이를 리밸런싱(rebalancing·일일 재조정) 거래라고 한다.

등락이 심한 날이면 레버리지·인버스 ETF의 대규모 리밸런싱 매매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지난 3월 20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코스피지수가 1400대 저점을 찍은 다음날 7.44% 급반등했다. 장 막판 선물시장에선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코스피200 지수선물 동시호가에서 약 1조1000억원어치가 거래되면서 선물 가격은 현물 가격 대비 2%포인트 가까이 높은 9.14% 상승했다. 이날 투신권은 선물 1조2895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이런 지수 왜곡 현상은 나흘 연속 같은 패턴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도 이를 유의 깊게 보고 있다. 금융시장국은 3월 말 ‘조사통계월보’에 “2013~2019년 거래를 분석한 결과 국내 레버리지 ETF가 코스피200 및 코스닥150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논문을 실었다. 한은에 따르면 레버리지·인버스 ETF는 시장이 1% 변동할 때마다 각각 순자산의 2%를, ‘곱버스’로 불리는 인버스2X는 순자산의 6%를 종가에 매매해야 한다. 코스피지수가 1% 하락했을 때 KODEX레버리지 ETF는 순자산(3조300억원)의 2%인 606억원을, KODEX인버스2X ETF는 순자산(2조2907억원)의 6%인 1374억원 규모를 각각 선물시장에서 팔아야 한다는 얘기다. 한 운용사 ETF 담당자는 “레버리지·인버스 ETF가 한국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규모가 비정상적으로 커졌다”며 “시장이 1% 빠지면 3000억원, 3% 빠지면 1조원 수준의 매물이 쏟아진다”고 했다.

심각한 악순환…피해자 속출

레버리지·인버스 ETF 거래가 많아질수록 지수 왜곡은 더 커진다. 전체 ETF 거래에서 레버리지·인버스 거래 비중은 80% 수준에 달한다. ETF 유동성공급자(LP)는 순자산을 늘려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레버리지·인버스 ETF 순자산은 10조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순자산이 커질수록 리밸런싱 물량도 많아져 지수 왜곡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들은 선물시장에서 이런 패턴을 눈치채고 차익거래에 나서고 있다. 낙폭이 심한 날이면 오후 들어 미리 선물을 팔았다가 장 막판 ETF 폭탄 매물이 쏟아졌을 때 다시 담는 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한 운용사 대표는 “불필요한 변동성이 생기면 시장이 더 투기적으로 변질되고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한다”며 “선물시장뿐 아니라 현물시장에서도 누군가 이익을 본 만큼 선의의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레버리지·인버스 ETF 쏠림 현상이 심해질수록 꼬리(선물시장)가 몸통(현물시장)을 흔드는 왝더독이 양방향으로 나타나게 된다”며 “시장 자율에 맡겨선 해결이 쉽지 않은 만큼 금융당국이 나서 수습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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